[중앙 시평] 갑신년 정치의 五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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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새해 들어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일주일 후면 또 설이다. 한 달 안에 양력.음력설이 동거한 셈이다. 이렇게 맞고 있는 올해 갑신년은 어느 명리학자의 말처럼 '푸른 원숭이'의 해다. "갑(甲)은 목(木)을 상징하는데 색으로 따지자면 푸른색이고, 신(申)은 원숭이를 가리키기에 갑신(甲申)은 '푸른 원숭이'인 셈이다. 그런데 푸른색은 오행상 도전.진취.의욕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니 갑신년은 재주 많은 원숭이가 의욕이 넘쳐 날뛰는 형국으로, 서로 잘났다는 푸른 원숭이들이 한 판 난장(亂場)을 벌이는 해가 될 것이라는 풀이다. 17대 총선이 있는 해이니 더욱 그럴 것도 같다.

*** 원숭이들이 난장 펼치는 형국

또 갑신년은 쇠(金) 기운이 많은 땅에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형국이라고도 비유된다. 게다가 그 쇠 기운이 나무의 곁가지들을 쳐내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변화와 개혁이 불가피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래저래 갑신년 올 한 해는 쉽지 않은 해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재주를 뽐내는 푸른 원숭이들의 난장이며 쇠 기운이 나무의 곁가지를 쳐내는 변화무쌍한 시기인 2004년 갑신년을 큰 탈없이 무사히 넘기고 좀더 나은 내일을 열어가기 위해 우리 정치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첫째, 극단을 피하는 정치를 하자. 요즘 '올인'이란 말이 유행이다. 모두 거는 거다. 대통령직도, 당운도, 나라 운명도 모두 걸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재주 많은 원숭이들이 난장을 벌이는 형국의 올해 총선 같은 경우엔 어차피 완승도 완패도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 '까짓 것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은 정말 곤란하다. 항상 극단이 문제다. 극단의 말과 행동만 피해도 국민은 시름 좀 덜겠다. 그러니 극단은 피하자.

둘째, 적과 동침하는 정치도 해보자. 진보와 보수가 동거할 순 없을까. 3김시대 이후 어차피 한국정치는 다원화하고 있다. 이념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대립을 풀고 동거할 생각을 해보자. 어차피 힘은 분산되고 있다. 예전 같은 절대적 권력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권력들의 이런저런 동거가 불가피한 형국이다. 공생하기 위해선 동거정치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편하다. 국민이 원하는 건 싸움이 아니라 해결이며 상생이기 때문이다.

셋째, 긍정의 정치를 펼치자. 한국의 정치는 부정의 정치였다. 특히 지난 대선 이후 상대를 부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러시안 룰렛' 같은 게임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게임은 결국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두를 죽인다. 정치란 파트너십이다. 상대가 있음으로 자신도 존재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 많이 잊고 산다. 힘의 균형, 적절한 견제는 민주정치의 기본원리다. 그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상대를 긍정해야 한다. 긍정의 정치만이 한국을 바꿀 수 있다.

넷째, 감동 주는 정치를 하자. 총선이 다가오자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다가서려고 애쓰는 것이 보인다. 흰머리 검게 염색하고 소녀처럼 단발머리 커트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람들이 감동할까. 감동은 파동이다. 가까운 곳에서 먼 데로 퍼져나간다. 작은 감동이 큰 울림을 갖는다. 그러니 가까이 있는 곳부터 감동시켜 봐라. 감동 없이는 정치도 없다. 정치는 감동의 예술이다.

*** 정치 불확실성 줄이기 나서라

다섯째, 칭찬의 정치를 하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실 대한민국에서 칭찬이란 단어는 마치 사어(死語)가 돼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는 칭찬 좀 하고 살자. 무조건 상대방이 하는 일에 대해 말꼬리 잡고 뒷다리부터 걸겠다고 달려들지 말고, 좀 넉넉하게 서로 칭찬할 것을 애써 찾는 정치를 해보자. 칭찬하고 덕담하는 어른스러운 정치가 아쉽고 그립지 않은가.

푸른 원숭이들이 난장을 펼치고, 쇠 기운이 나무의 곁가지를 쳐내는 변화무쌍한 시기다. 그만큼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앞서 말한 정치 5계를 실천해 보자. 갑신년 정치의 불확실성을 '확'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불확실성을 줄일 때 경제도 웃고 국민도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