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댐」과 「우국충정」/오홍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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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엄청난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낄때 사람들은 현기증과 함께 두 다리의 힘이 쭉 빠지는 휘청거림을 느낀다. 그래서 더러는 주저앉기도 한다. 평화의 댐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특감결과 발표를 보면서 민초들은 바로 그런 걸 느낀다. 그것은 이내 이 땅의 백성들은 어찌하여 누대에 걸쳐 짓밟히고,차이고,속아 살기나 하는지 하는 박복에 대한 탄식과 함께 울컥 치미는 서글픔으로까지 이어진다.
○국민들 기만에 비애감
감사원의 발표내용은 요약하자면 86년 전두환 대통령과 장세동 안기부장 등 5공의 고위층이 당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 직선제 개헌요구 등 민주화 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조작하는 수법으로 북한 금강산댐의 수공위협을 최고 여덟배까지 과장해 위기 의식을 조장한뒤 규탄대회를 유도하고 국민의 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응댐을 착공키로 결정한 뒤에야 명분을 짜맞췄으며,수공으로 올림픽이 위협받는다는 터무니없는 논리까지 「개발」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그것이 불과 7년전의 이야기다.
수도 서울이 공격을 받는다는데,63빌딩의 3분의 2가 물에 잠기고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쑥대밭이 된다는데,어렵사리 유치한 올림픽을 치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데 규탄하지 않고 성금 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신문·방송이 앞장서서 북과 장구를 쳐대는 가운데 기업들은 할당된 금액을 납부했고,공무원과 샐러리맨들은 월급에서 일괄 공제로 성금을 냈다. 한달 구멍가게 수입을 몽땅 털어 들고 간 실향민도 있었다.
그렇게 거둔 성금이 7백73억여원. 당초 모금 목표액 4백억원을 초과했는데도 「분위기」를 잡기 위해 그해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운동 홍보를 보류하기까지 해가며 모금을 계속했다고 감사원은 밝히고 있다. 결국 수공위협이나 모금이나 댐건설 모두가 4천만 국민을 상대로한 한바탕 사기극이었다는 이야기다.
속 뒤틀리는 이 메스꺼움은 속아 넘어간데 대한 모멸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맥이 쭉 빠지고 아랫도리가 후들거리는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통치행위」 설득력 없어
전두환씨는 특감발표 바로 닷새전인 8월26일 감사원의 서면질의에 대한 답변을 대신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정중한 해명서를 내놓았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장문의 해명서에서 그는 양병천일 용어일일(한나절 싸움에 이기기 위해 1천일에 걸쳐 군사를 기른다)의 유비무환 정신이 바로 평화의 댐을 건설한 동기라고 했다. 단 1%의 잘못될 가능성에도 대비하는게 바로 국방이라는 이야기였다. 맞는 말이다. 그것은 대통령으로서 그의 책무요,그같은 그의 주장은 우국충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잘못될 가능성」은 객관성이 확보돼야만 한다. 객관성은 커녕 엉뚱하게도 국민들에게 겁을 줘 정국의 판세를 뒤집으려는 불순함이 깔려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국방일 수도,더더구나 우국충정일 수는 없다.
실제로 한국댐학회 및 미 공병수로국·대한화약기술학회가 조사·분석한 내용 어느 구석에도 2백억t의 물이 밀려와 수도권 일원을 물바다로 휩쓸 위험이 있다는 대목은 없었다고 감사원은 밝히고 있다. 게다가 이들 5공 고위층의 불순한 의도를 더욱 분명히 해주는 증거까지 확보된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국민성금 모금 자체가 「시국안정용」이라고 기록된 정부 문서도 발견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전직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의 입지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 측면에서도 그렇고,고도의 재량권이 부여된 통치행위에 대한 조사가 좋지않은 선례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이 「불가론」의 논거인데 국민 기만행위까지 통치행위로 간주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감사원의 고집스런 특감이 없었다면 그나마 평화의 댐이 지닌 기막힌 사연은 영영 윤곽조차 파악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전씨 역할조사 불가피
전씨측은 감사원 특감 결과에 대해 『감사원의 주장일 뿐』이라는 견해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감사원이 됐든 국회가 됐듯 전씨의 보다 구체적인 역할 등 진상을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무래도 통과의례용 서면조사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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