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영국식 선거개혁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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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작년 10월 본 칼럼에서 성공한 英國의 선거부패및 위법행위방지법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14代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회에서 여야간에 선거법 개정논의가 진행되던 때였다. 일부 정치인들로부터 개인적 관심 표명은 있었지만 당시의 혼탁한 사회분위기에서 선거부정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다.2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뒤 이제 대통령이 바로 그 英國의 선거제도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백10년前인 1883년 英國에서 포괄적인「부패및 위법행위 방지법」이 제정된 것은 더이상 참기 어려울 정도로만연된 선거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해서였다.지금은 최고 수준의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를 치르는 영국도 19세기 까지는 뿌리깊은선거 부패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15세기부터 매수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나 유권자 상대의 부패행위가 본격화한 건 1832년제1차 선거법개정으로 유권자 수가 인구의 약 3%로 늘어난 이후부터였다.그것이 1868년의 선거법개정으로 8%로 늘어나면서선거 부패는 더욱 극심해졌다.
1870년 보편화된 買票행위로「부패市邑」(Rotten borough)으로 판정돼 선거구 특권이 박탈된 아일랜드 카셸에서 나온 우스갯소리에서 당시의 선거 부패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한표에 20파운드란 거액이 오가는 매표 풍조를 고 쳐야 겠다고 생각한 한 후보가 敎區목사에게 매표의 비도덕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부탁했다.목사는 주일예배 때『표를 파는 등의 방법으로 정치를 타락시키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경고했다.그랬더니 어느 유권자는 후보에게『이제까진 20파 운드를 받았지만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하자면 앞으로는 40파운드는 받아야 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부패방지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던 1880년의 총선에서는 42건의 당선 무효소송이 제기돼 16명의 의원이 의석을 잃었다.당시의 부패 조사 기록을 보면 갖가지 매수방법이 총동원되고 있다.선술집을 빌려 향응를 베풀고,그 別室에서는 노골 적으로 매표흥정을 벌이고,밤중에 外地출신 운동원을 동원해 유권자에게 금품을 전달하고,갖가지 명목으로 자리를 만들어 후한 임금을 주고 고용하거나 비싸게 물품을 조달했다.지금 우리나라 선거 풍경과 비슷한 일들이 1백10여년전 英國에서 도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총체적 선거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제정된 것이 바로「부패및 위법행위 방지법」이다.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그 이후 선거소송이 격감했고 20세기 들어서는 영국에서 선거부정은 자취를 감췄다.영국에서 선거개혁이 성공을 거둔 것은 우선法이 매우 엄격했고,극심한 선거부패에 食傷한 국민들이 이제는 안되겠다는 의식이 무르익었으며,새로 집권한 글래드스턴 내각의 개혁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부패방지법은 부패및 위법행위의 처벌강화,위반자의 광범한 선거권및 피선거권 박탈,대리인의 부패.위법행위가 후보에게 미치는 연좌제 도입,선거비용의 철저한 제한및 관리를 골자로 하고 있다.그중 핵심은 대리인의 잘못이 후보의 당선 무효및 피선거권 박탈로 연결되는 連坐制다.
후보는 스스로 또는 고의적 승인하에 금품제공등 부패행위를 한경우 당선무효와 함께 영구히 하원의원 피선거권을,기타 위법행위를 한 경우 7년간 당해 선거구에서 피선 자격을 잃는다.
후보는 대리인이 부패행위를 한 경우에는 7년,기타 위법행위의경우는 당해 하원의원 임기동안 피선자격을 잃게된다.후보가 아닌사람도 부패행위로 유죄가 확정되면 형사처벌과 함께 하원의원 피선거권.공직 선거권.공직취임권을 7년,위법행위의 경우는 5년간상실한다.더구나 선거에 관한 소송은 계속적인 심리로 단시일에 끝내도록 규정해 위법행위를 하고도 장기간 의석을 유지하는 길을원천봉쇄했다.
영국에서도 이렇게 엄격한 법이 제정되기까지는 저항이 많았다.
1881년1월에 제안된 법안은 2년8개월동안 두차례의 철회.재제출이란 우여곡절과 열띤 攻防을 거듭하는 難産을 겪었다.자유당내각의 글래드스턴총리와 제임스법무장관의 강한 사 명감과 강인한개혁의지가 아니고선 이 법률이 아마 햇볕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치권-국민의 합작품 지금 우리나라도 집권층의 개혁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고양되어 있다.그러나 지난번 溟州-襄陽,大邱東乙및 春川의 보궐선거 양상을 보면 선거개혁 의지가 과연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급하면 舊態로 돌아가는 정도의 개혁마인드로 舊 態와의 철저한 斷絶을 의미하는 영국식 선거개혁이 과연 가능할까.국민의 의식도 문제다.선거를 후보의 주머니를 터는 기회쯤으로 보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선 선거개혁은 百年河淸이다.그런 의미에서 정치개혁은 집권자.정치권.국민의 합작 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論說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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