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검증 받은 국회/최훈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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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90년 26개법안의 국회 날치기 통과에 대한 헌법소원과 관련한 국회현장 검증을 위해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등 재판관 전원이 24일 이만섭 국회의장실을 찾았다.
이날 국회의장실은 국회의 고유기능인 입법과정의 위헌성여부를 헌재가 현장검증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날 현장은 결국 군데군데 납득키 어려운 해프닝의 연속으로 끝나고 말아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인사말을 건넨 이 의장은 『13대때 일을 갖고 왜 이제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야당측 배석자들을 은근히 겨냥했다.
마치 초상집 곡후에 누가 죽었느냐고 묻는 식이었다.
이 의장은 『취임직후 내가 날치기를 절대 않겠다고 하니 여당 간부들이 저 양반이 진짜 안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고까지 했다』며 『나는 절대 날치기를 안할터인데 텅텅 비어있는 본회의장은 봐서 뭐하겠느냐』고 거부했다.
야당측은 청구인 자격으로 배석한 강철선의원(민주) 등은 『의장은 피청구인지위에 있다. 정당한 사유없이 기피하면 헌재법 76조에 의해 처벌을 받게된다』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국회의장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국회의장은 국회의 수장으로서 국회의원들 스스로 그 권위를 지켜주려고 노력해야 할텐데 의원들이 앞장서 오히려 그 권위를 짓밟으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헌재의 손님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이 의장은 상기된 표정으로 『국회법 1백50조에 따르면 의장허가없이는 본회의장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헌재측은 이 의장과 야당측 인사들간의 기막힌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의장은 그러면서 『위헌결정이 나면 이들 법에 의해 취해진 그간의 국가행위는 뒤바뀌어야 하는가』라고 궁금증을 표시했다.
그러나 자신있게 대답하는 참석자들은 끝내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헌재측이 국회의장의 간곡한 호소를 받아들여 본회의장 검증을 철회하고 의장접견실에서 약식으로 당시 상황을 검증했다.
이날 이 의장은 『정치문제는 정치적으로 풀어야지 법에 의해 해결돼서는 안된다』는 원론만 누차 강조했다.
민자당은 이날의 현장조사에 대해 『국회권위를 위해 다시는 이런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으며,민주당측은 본회의장 조사거부에 유감을 표명하는 등 사후 공방전을 벌였다. 국회가 조사를 받아야하는 수치스러운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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