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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석상에 모습 드러낸 탈레반, 협상에 적극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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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03면

11일 탈레반 세력 협상대표인 카리 바시르(가운데)와 물라 나스룰라(오른쪽)가 한국 측과의 2차 대면협상을 하던 중 이례적으로 공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프간 정부의 신변보호 약속을 받고 시내 중심가의 협상장에 나온 이들은 “협상이 잘 돼가고 있다”며 “인질들은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가즈니시(아프가니스탄) [AP=연합뉴스]

한국인 23명이 아프간 탈레반 세력에 의해 납치된 지 3주를 훌쩍 넘긴 11일 오후 3시40분. AP통신이 긴급 뉴스를 내보냈다. 한국 측과 협상하다 나온 탈레반 측 대표가 “협상이 긍정적이며, 오늘 내일 중으로 한국인 인질이 풀려날 것”이라고 밝혔다는 내용. 전날 오후 한국 측과 탈레반의 첫 대면 협상이 돌파구 없이 끝난 데 이어 이틀째 열린 협상에서였다. 24일간 한국민 전체가 인질이 된 듯한 상황을 타개할 희망의 메시지로 해석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 수감자 석방을 받아들인다면”이란 전제를 달았다. 사실상 ‘원점 복귀’를 뜻하는 말이다.

수감자 석방 고수하면서도 “한국인 곧 집으로 돌아갈 것”… 한국 정부는 낙관론 경계

우리 정부 측도 “인질 석방이 임박했다고 보지 않는다”며 낙관론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날 탈레반 측은 ‘살해’ 위협을 하지 않았다. 얼굴 없는 대변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전하던 관행을 벗어던지고 ‘적진’인 가즈니시 도심에 나타나 전격적인 공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례적이다. 공개적인 기(氣)싸움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몸값을 받고 협상했다”는 비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명분용일 수도 있다. 한국인 인질이 추가로 살해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 문제가 해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탈레반 측 협상 대표인 물라 나스룰라와 카리 바시르는 기자들에게 “한국인이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물론 우리 동료들도 돌아올 것”이라며 전제조건을 재차 강조했다. 아프간 정부는 인질과 탈레반 수감자 교환은 탈레반의 납치를 부추길 뿐이라는 원칙론을 강조하고 있다. 메라주딘 파탄 가즈니 주지사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며 이들과 다른 입장을 밝혔다. 앞서 아프간 정부 측 협상 참가자인 마무드 가일라니는 “죄수를 석방할 수 없다는 아프간 정부의 원칙은 확고하다”면서 “몸값으로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간 정부에 대해 “2000명의 아프간 주둔군을 철군시키겠다”는 압박카드를 썼던 이탈리아와 달리 우리 정부의 카르자이 정부에 대한 카드는 별로 없다. 하지만 분위기는 바뀌는 듯하다.

먼저 탈레반의 적극성이다. 탈레반 협상대표단은 이날 한국 정부대표단과의 대면 협상을 위해 가즈니시 중심가의 국제적십자사 2층짜리 건물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일 우리 측과 직접 대면 협상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유엔의 신변보장 등을 고집하며 시간을 끌어온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신변보장을 받았다.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해온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dpa 등 외신에 전화를 해 탈레반 최고회의가 나스룰라와 바시르를 협상 대표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전권이 있다고 강조했다.

협상 타결의 기대감은 아마디의 언급에서도 감지됐다. “나스룰라 등은 탈레반 전사와 인질의 맞교환, 한국군의 철군 등 우리의 요구조건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AFP와의 통화에선 “8명을 석방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지만 대화하는 과정에 조금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도 했다. 납치 직후보다는 입장이 많이 유연해진 셈이다.

이들의 태도 변화는 탈레반이 한국인 인질 협상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올렸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2001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으로 정권이 붕괴된 이래, ‘탈레반의 부활’이 공인되는 계기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탈레반이 전격적인 기자회견을 하고 나선 것도 한 예다. 따라서 탈레반이 단계적으로 상황을 풀어가면서 정치적 목적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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