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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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현담(1955~) '길' 전문

저녁 어스름
길에 나가서 길을 묻는다
저기 마을 안쪽은 환한 스크린이다
사람들 크게 번지다 사라진다

길 위에서
누가 길을 묻는다
그림자 길게 끄을며 아직 누가 길을 묻는다



길 위에서 길을 물었던 나날들…. 길의 초입에서부터 길은 낯설기만하고, 그곳 어디에서 늘 허둥대며 초조하게 서성이다가 해는 지고 바람은 불고, 가까운 마을의 불빛들은 스크린보다 환히 빛나고, 어디선가 저녁을 먹으라고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다정하게 들리던지…. 주저앉아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어딘가에 길이, 빛나는 언덕이 꼭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터벅터벅 걷던 그리운 생의 시간들. 슬프고 못생겨서 가슴 안이 따뜻하게 저려오던 나날들…. 현담은 승려다. 세속에서의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978년 문학사상에 처음 시를 발표했다니 그로써 그의 이력을 짐작할 뿐이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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