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존엄사 허용, 생각해 볼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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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뇌사 상태 아들의 인공호흡기를 의사 몰래 떼어내 숨지게 한 아버지가 살인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사건이 존엄사(尊嚴死)에 관한 오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 허용을 논의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지만 인간으로서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할 권리도 존중하는 게 옳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존엄사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양측 입장의 근거는 모두 생명의 존엄성이다. 하지만 회복 가능성 없이 무의미한 삶을 연장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하는 것이 오히려 인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결과일 수 있다. 게다가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걸 견디지 못해 먼저 존엄사를 요청하는 환자도 있다.

 세계적으로도 존엄사를 인정하는 추세다. 프랑스·홍콩·대만은 존엄사를 법과 제도로 인정하고 있다. 영국·네덜란드는 약물 등으로 중환자가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게 하는 안락사(安樂死)까지 허용한다. 미국 대법원도 지난해 안락사를 돕는 의사들을 무조건 처벌하는 조치가 잘못됐다고 판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안락사를 지지했다.

 우리 사법 당국도 6월 소생 가능성 없는 환자의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한 자녀와 집행한 의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려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했다. 하지만 2004년 보호자 요구로 환자를 퇴원시켰다 사망케 한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확정 판결을 받은 뒤 대부분 의사가 ‘방어 진료’에 매달리는 형편이다. 이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네덜란드 식 안락사는 아니더라도 회생 불가능한 환자에게 품위 있게 인생을 정리할 기회는 줘야 한다. 중환자실에서 각종 기계장치에 의존한 상황에서는 그럴 틈이 없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의사를 무조건 처벌하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대상과 절차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뒤 본인 또는 가족의 의사를 존중해 존엄사를 허용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