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친 北…美 강경파 자극 우려

중앙일보

입력

평북 영변의 핵 시설과 핵 개발 실태를 공개했다는 북한 외무성의 발표는 미 민간대표단이 평양을 막 떠난 10일 오후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나왔다.

"우리는 요술을 부릴 줄 모른다"는 외무성 대변인의 이날 언급에서는 '핵 활동 상황을 눈으로 확인케 해줬으니 이제 미국이 알아서 해보라'는 메시지가 감지된다. 공을 미국으로 떠넘긴 것이다.

지난해 10월 "플루토늄을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용도를 변경시켰다"고까지 밝혔으나 미국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를 실증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무엇보다 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과거 '확인도 부인도 않는' 입장을 취해온 북한이 이젠 전략적으로 스스로 입증해 보이는 쪽으로 방향을 확 바꾼 점이 주목된다는 것이다. 교수.전문가가 주축이 된 미 민간대표단을 맞이하는 데 백남순 외무상 등 고위 관리들이 나서고 이를 관영 매체가 보도함으로써 무게를 실어준 것도 이채롭다.

하지만 북한의 의도대로 미국이 움직일지는 미지수다.

부시 행정부의 관리들이 미 민간대표단을 활용한 북한의 움직임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 데다, 평양 측의 압박에 끌려가는 모습은 피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번에 공개한 핵 억지력이 다량의 플루토늄으로 확인될 경우 미 강경파를 자극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난해 8월 1차 회의 이후 표류 중인 6자회담의 틀이 깨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의 핵 억지력 공개는 중국이 푸잉(傅瑩) 외교부 아태국장과 닝푸쿠이(寧賦魁)북핵 특사를 곧 미국에 파견하는 등 6자회담 2차 회의 개최 움직임이 본격화한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회담을 앞두고 협상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라는 풀이다.

실제 북한은 지난해 4월 베이징(北京) 3자회담에서 '핵 능력의 물리적 입증' 언급을 하는 등 회담 테이블이 마련될 때마다 '핵 카드'의 몸값을 올리려는 행태를 되풀이해 왔다. 6자회담 1차 회의를 앞두고는 핵 재처리 완료 입장을 미국에 통보하기도 했다.
이영종 기자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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