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4)63년 JP제거 주장 「악연」계속-전씨|옛 라이벌 손영길씨 5공 내내 빛 못 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윤씨가 소장 계급장을 회복한 것은 87년 대통령선거 무렵이었다. 5공 시절 내내 윤씨의 숙원을 들어주지 않다가 선거를 앞두고 정승화씨 문제가 터지자 일괄 해결해주었다.
전대통령의 윤 장군에 대한감정은 아무튼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윤씨가 하나회를 밀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를 하나회의 대부라고 하지만 전대통령은 하나회의 진짜 후원자를 박대통령으로 생각했지요. 윤씨도 하나회 창설과정을 잘 몰랐거든요. 하나회는 전대통령이 박대통령의 묵시적 동의를 구해 만든 겁니다.』(A씨)

<처세술 귀재·평판>
그러나 전씨는 한동안 윤필용·박종규씨와 다 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서로 전씨가 지신을 제일 따르는 부하로 믿었을 정도였다. 「전씨는 처세술의 귀재」라는 말이 나올 만 했다.
Q씨의 이어지는 회고.
『5·16직후 윤씨는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이었고 박씨는 경호담당관으로 한 단계 낮았지요. 그러나 나중에 경호실장과 수경사령관으로 만났을 때는 경호실장이 위일 때가 많았지요 이런 점 때문에 박씨가 경호업무가 끝난 후 저녁을 살 때면 윤씨는 참석하지 않고 대신 참모장을 보냈지요. 내부적으로 두 사람이 거북한 관계였지만 전씨는 양쪽 모두로부터 신임을 얻었지요. 전씨의 탁월한 처세술 덕분입니다.』
박종규씨에게는 육사출신 선배들보다 그(박씨는 육군종합학교 5기)를 더 잘 모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씨는 깍듯했다. 윤필용씨에게도 제일 위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전씨는 행동했다. 두 사람의 미묘한 경쟁관계로 자칫 한쪽으로부터 경원 받기 쉬웠으나 양쪽 모두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전씨의 재산이기도 했다.
전씨의 이 같은 처세술을 놓고 11기 비 하나회 동기생들이나 선배들은 권력주변의 움직임 에만 신경 쓰는 정치장교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 전씨의 의리론은 항상 자신이 1등 하는데 에만 이용되는 상황논리라는 것이다. 5공 시절 손영길씨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그가 권익현씨와 달리 윤장군 사건수사과정에서 하나회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전씨의 판단이 깔려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오랜 경쟁심리의 산물이란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5·17 후 김종필씨(JP)의 좌절은 전씨와의 악연에 기인한 바도 있다. 63년 JP의 공화당 사전조직이 드러나면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이 터졌을 때 정규 육사생들은 흥분했다. 중정 인사과장인 전두환 소령·방첩대의 노태우 소령 등이 주동이 돼 이를 문제삼아 김종필계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들고 나왔다. 소위 11기 친위쿠데타 얘기다.

<정승화씨 불문주장>
7월초 이들이 거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진해에 있다 이 소동을 보고 받고 크게 화내며 관련자들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임무는 정승화 방첩대장에게 떨어졌다. 당시 김재춘 중정부장은 11기생들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정승화씨의 회고.
『법석이 일었지요. 그때 최고회의 내무위원으로 있던 김형욱은 후끈 달아 이들을 다 잡아넣어야 한다고 야단이었지요. 박 의장의 지시로 조사해봤더니 별게 아니더라구요.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젊은 혈기로 말할 수 있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내가 박의장에게 불문에 부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보고를 올렸지요. 난 결과적으로 그들을 구제한 셈이었습니다.』
정승화 전 총장이 「구제」라고 한 표현에 대해 신군부측도 그때는 「신세를 졌다」고 수긍한다. 소령시절의 이런 기억에다 박종규·윤필용씨와 가까웠던 전씨는 JP에 대해 누구보다 인색한 평가를 했다.
12·12후 공화당 내에 박찬종(현 신정당대표)·오유방씨 등 소장의원들이 JP를 겨냥하는 정풍운동을 벌였을 때 전 령관의 반응은 JP에 대한 감정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신 군부 멤버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정풍운동을 꺼내 「소장파의원들이 JP한테 너무 심하게 한다」고 비난했지요. 그런데 전 사령관의 반응은 딴 판이었지요. 「JP의 부패한 점을 정풍파가 정확히 지적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걸 듣고 전 장군이 머리 속에 꼽고 있는 지도자가 JP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요.』(A씨)


이에 대해 JP와 같은 8기생 출신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씨가 추종했던 윤필용씨는 5·16에 직접참여하지 않았고 박종규씨도 계선조직에는 없었던 인물로 이들은 5· 16의 열매만을 즐긴 사람들입니다. 5·l6정신도 제대로 모른 채 박대통령만 쳐다 본 이들 밑에 있었던 전씨의 사고방식과 처세는 권력의 은밀함과 음모를 동경하는 쪽으로 발전했을 겁니다.』
이후락·김형욱과 전씨는 특별한 친분이 없었다. 하나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윤·박과 친하면 됐지 다른 쪽에다 눈 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처세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60년대 말 사석에서 만났을 때 「이후락은 정치자금을 거둬 1억은 대통령에게 갖다주고 1억은 자기가 챙긴다」는 식으로 전대령이 얘기한 적이 있지요.』
하나회 후배 Z씨의 기억으로 보면 그런 부정적인 인식 탓인지 이씨의 도자기 굽는 생활은 5공내내 지속됐다.
60년대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에 하나회는 늘 손볼 경계대상이었다. 67년 중앙정보부한테 하나회가 걸려들 뻔한 적이 있었다. 정보부 안에 11기 동기생인 이상훈 인사과장·김광욱 군사과장등 반 하나회 그룹이 포진돼 사조직의 문제를 제기했었기 때문이다.
『김형욱의 군내 사조직 보고를 받고 박대통령은 김계원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도록 지시했고 김재규의 보안사령부가 조사했지요. 결국 경고성 조사로 끝났지요. 박대통령이 하나회를 키운 것은 군내 이북파를 견제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군은 경상도 그룹과 이북출신(김형욱은 이북출신)들 간의 알력이 심했지요 .만일 박대통령이 김재규가 아닌 정보부에 조사를 시켜 김형욱에게 걸렸으면 하나회는 그때 작살났을 겁니다. 당시 중정 기획실장으로 있던 강창성 장군은 김형욱과는 같은 입장으로 보안사령관으로 가면서 중정의 하나회 관련 조사 기록을 가져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Z씨)
강창성씨는 82년12월23일 김대중씨가 형 집행정지로 미국으로 출국하던 날 영등포구치소후문으로 나왔다. 그의 옥살이는 전두환 식 의리의 반대급부였다. <박보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