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진풍경… 의장­여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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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의사미숙… 쓸데없이 잡음만” 핀잔/민자/“눈치 안보고 올바른 국회상 정립”/의장
요즘 국회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 같으면 으레 한 목소리를 내야할 국회의장과 여당이 국회 운영방식을 둘러싸고 거칠게 설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자당은 이만섭 국회의장의 국회운영이 세련되지 못해 쓸데없는 잡음만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반면 이 의장은 『의장이 옛날처럼 여당 눈치만 살피는 것에서 탈피하는게 곧 개혁』이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이 의장과 민자당이 싸우게 된 발단은 지난 3일 본회의에서 이 의장이 민주당의 박계동의원에게 황인성 국무총리의 12·12 평가와 관련한 의사진행 발언을 준뒤 곧바로 황 총리의 답변을 요구한데서 비롯됐다.
황 총리에 대한 의장의 답변요구가 있자 민자당은 김영구 원내총무를 필두로 이 의장에게 거침없는 야유와 삿대질을 해댔다.
이에 뒤질세라 이 의장도 『여당도 단상밑에서 소리치지만 말고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하면 될게 아니냐』고 무안을 주었다.
황 총리는 이 틈새에서 한동안 일어섰다 앉았다 어쩔줄 몰라하다가 한차례 정회소동을 겪고 난뒤 겨우 답변대에 섰다.
그러나 이 의장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황 총리가 답변을 끝내자마자 『총리는 국회에 나왔으면 의장의 말을 들어야 한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 말에 민자당은 또 한차례 격앙했다.
민자당은 5일 고위당직자 회의를 열어 『정부대표인 총리를 여러 공무원이 보는 데서 심하게 면박을 주고 질타한 것은 지나친 월권』이라는 불만을 모으고 김 총무를 이 의장에게 보내 항의했다.
김 총무는 이 의장을 만나고 난뒤 기자들에게 『12·12 문제는 지난 5월 임시국회에서 정치적으로 마무리됐으므로 의사진행발언 대상이 안되면 이 의장은 발언내용을 미리 신중히 살핀뒤 허용했어야 했다.
결국 이 의장이 판단을 잘못해 도리어 의사진행에 차질만 빚었다』며 모든게 이 의장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김 총무는 『이 의장이 앞으로 의사진행 발언내용을 사전에 잘 분석해보겠다고 하는 등 우리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며 마치 이 의장을 굴복시킨 듯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이 의장은 『항의는 무슨 항의며 누가 의장에게 충고한단 말인가. 나는 김 총무가 문안드리러 온줄 알았다』고 가당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국회는 어느 정파의 국회가 아니라 국민의 국회다. 여야는 자당 입맛에만 맞도록 국회를 운영하려는 군사문화시대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앞으로 아무리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올바른 국회상 정립에 진력하겠다』며 민자당의 감정을 싹 무시하는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나아가 『의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회 법조문을 고치느니 어쩌니 하지만 조문개정에 앞서 의장에게 삿대질하고 소리치는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고 민자당 지도부에 대한 불쾌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회 주변에선 이번 사태는 민자당이 과거 여당처럼 의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의장도 미리 잘 알아서 행동할 것이라고 오판한데다 이 의장의 스타일을 평가절하한데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이 의장은 그러나 구 공화당 시절부터 바른말 잘 하는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특히 3선 개헌을 앞두고 막강권력의 소유자인 김형욱 정보부장과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의 퇴진을 주장하며 개헌반대 발언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따라서 민자당이 이 의장의 개성을 무시하고 과거 여당처럼 행동하려 든다면 이번과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의 독특하고 돌출적인 언행은 때론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설사 이 의장의 인기를 의식한 미숙한 국회운영에서 비롯됐다 하더라도 이번 일을 계기로 과거 여당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허세 의장이 아닌 여야 모두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권위있는 의장상이 정립돼야 한다는 지적이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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