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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문민화/김영배(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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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력은 속성상 억압적이다. 적어도 갤브레이스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권력의 해부』라는 책에서 권력은 원초적으로 물리적·억압적인 힘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따라 단순한 억압에서 보상적인 권력으로,그리고 조종적인 권력으로 세련되게 바뀌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겉모습이 어떻든 권력의 밑바닥에는 억압적인 힘이 깔려있다. 우리는 지난 군부 통치시절 바로 이같은 권력의 원초적인 행사방법에 익숙해왔던게 사실이다.
○확대지향 억압적 속성
갤브레이스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한다면 그처럼 권력자의 퍼스낼리티를 기초로 한 억압적 권력에는 「아첨효과」(sycophantic effect)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권력의 주변에서 권력을 가진 자의 영향력을 공유하고 싶어하고,그의 그늘에서 살고 싶어하는 현상이다. 그것이 권력의 환상을 확대하고 권력을 과대 행사하도록 부추긴다.
우리가 이런 권력의 파생적인 효과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에 군부통치 30여년이 권력의 과대행사에 너무 손쉽게 젖어드는 습성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과거 군출신 통치자들의 군대식 권력행사 방식 앞에서는 권력이 통하지 않는 「여백」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한 경험을 우리는 셀 수도 없이 가지고 있다. 최근 폭로되고 있는 평화의 댐은 그런 하나의 단적인 예다. 그때는 모두가 북한의 수공위험을 지적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각계가 동참하고 언론이 그것을 증폭시켰다.
이견과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의 행사가 결국은 허구의 댐을 낳았다. 아니 그것이 어떤 일면의 진실을 갖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다른 아무런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용서못할 권력의 남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론없는 획일 치달아
그것은 그 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기억이었다. 최근에 나온 소장판사들의 사법부개혁 의견서는 바로 그런 아픈 기억들에 관한 준열한 반성으로 느껴진다. 아무런 이견도,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적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고 모든 비판을 봉쇄하며 학계를 길들이고 결국은 법의 중립성을 훼손하는데까지 확대된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검찰권의 정치적인 운용으로,사법부의 권역에 대한 용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니던가.
문제는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권력적인 습성이 우리의 정부·정당 곳곳에,그리고 우리 의식속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당에서는 윗사람의 「진노」을 겁내고,관료들은 윗사람의 「심경」을 민감하게 읽어내는 일에 신경을 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이같은 권력습성 때문에 개혁적인 정책추진이 간혹 신권위주의 모습으로 변형돼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인가 되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잘못된 부패관행을 뜯어고치고,과거의 잘못된 정치권력 행사를 시정하고,과거의 잘못된 구습을 혁파해가는 과정에서 권력행사는 보다 강력해지기 쉽다. 쾌도난마식의 강한 권력행사가 요구된다 말이다. 특히 사정적인 개혁에선 더 그러하다. 부정부패 분자를 「일거에」 잡아넣는데 대해 국민들은 속시원해 한다. 거들먹거리던 고관대작들이 「가차없이」 쇠고랑찰 때 개혁의 정당성과 권위가 보증받는다.
개혁의 강력한 확산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좀 무리가 있더라도 개혁적인 권력의 강력한 추진을 요구할 수 있다. 개혁의 과정이 순탄치 않을 때 그런 장애물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은 분명히 누구나 느낄만하다.
『모두 고통분담을 하는 시기에 임투가 웬말이냐,근검절약이 절실한 시기에 화환·청첩장이 무슨 말이냐….』 집단이기주의를 「절대 불용」하고 비개혁적인 요소를 「일도양단식으로 척결」하며 말을 듣지 않는자들에게는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기 십상이다.
○설득·합의의 관용필요
그러나 모든 것을 획일하려 할때 권력의 경직성이 나타날 수가 있다는 점을 항상 자계해야 한다. 문민적 개혁의 요체는 권력의 올바는 행사에 있다. 그것은 설득과 합의라는 길고 지루한 과정을 필요로하는 것이며,그 바탕은 바로 관용의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제도와 법을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합의와 합법의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권력은 과소평가될 때보다 과대평가될 때가 더 오류가 많을 수 있다.』 갤브레이스의 말이다.
지난달 과대평가됐던 권력의 환상과 습성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문민화의 지향점이어야 할 것이다.<통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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