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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4년 3월1일 「하나회」"도원결의"-김복동 소령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전두환 대통령은 88년 퇴임 직후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솔직히 말해 가장 무서운 단체가 군대였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천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총구가 거꾸로 자신을 겨냥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의식했다. 그런 경계심은 동서고금 권력의 생리적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의 모태는 하나회다. 12·12와 5·17을 겪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결속력과 두뇌를 과시한 조직이 정규 육사출신의 사조직 하나회이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그런 하나회를 한편으로는 의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부담을 느끼며 견제했다. 그가 권력을 내놓으면서 실토한 군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하나회와 보안사에 대한 것이었다.

<11기 군 요직에 배치>
전 대통령은 80년말부터 『나는 군대의 대통령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회의 대통령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을 명심하라』고 하나회 실세들에게 직·간접으로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육참총장, 보안·수방·특전사령관, 육본인사 참모부장 등 요직엔 거의 예외 없이 하나회를 배치했다. 전 대통령의 하나회에 대한 믿음과 의존은 실제 대단했지만 하나회와 거리를 두려는 제스처와 행동을 꾸준히 보였다. 그가 얼마나 2중적 자세로 군부를 관리해 왔는지는 일화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자신의 동기인 육사 11기들의 군 부내 배치였다.
그는 83년12월 하나회의 정호용 대장을 총장에 임명해 정규육사 총장시대를 열었지만 이기백·이상훈씨 등 비 하나회 동기들도 균형있게 배려했다. 전대통령과 하나회의 관계를 좀더 정확히 살펴보려면 하나회의 결성과정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하나회의 결성 날짜·장소·창립 멤버들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회가 정식 결성된 것은 64년3월1일 새벽 김복동 소령 집에서였다. 당시 전두환 소령은 처가살이를 하고 있을때라 김복동의 집이 자연스레 모임장소로 이용됐다.
이들은 2월28일 초저녁 모였지만 3·1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뜻에서 결성식을 1일 새벽에 가졌다. 을지문덕, 강감찬, 임진왜란, 한말의 비극, 6·25를 거친 역사존망의 경험을 되새기고 어떤 상황에서도 뭉치자고 다짐하면서 「나라의 기둥은 우리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강군을 조성하고 군의 비리를 없애는데 앞장서자고 두 손을 불끈 쥐기도 했다. 사뭇 엄숙한 분위기에서 의식이 진행됐다. 그리고 선서한 뒤 마지막에 「이를 어기고 배신한 자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고 약속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은 죽음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2, 13기생은 빠져>
모임의 명칭에 대해 일심회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순수 우리말로 하자고 전 소령이 제안했다. 하나회란 명칭은 김복동 소령의 아이디어였다. 전 소령은 단합을 상징하는 「한 모임」으로 하자고 했으나 김 소령이 『한 모임이라고 하면 회장을 「한 모임 장」「임장」이라고 붙여할 판인데 곤란하지 않은가. 하나회로하자』고 해 통과됐다. 혈서를 쓰자는 얘기도 있었으나 너무 형식적이라고 해 채택하지 않았다.
둘러서서 팔짱을 끼고 큰 대접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는 것으로 식은 끝났다. 이 모임이 외부로 알려졌을 때의 문제점을 참석자들은 알고 있어 철저한 보안이 강조됐다.
창립모임에 12, 13기는 끼지 않았다. 이들이 끼지 못한 것은 정규육사 동창회인 북극성회를 11기의 전 소령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발상이 14, 15기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3·1모임에는 11, 14, 15기가 중심이 됐다. 11기의 전두환·노태우·김복동·권익현·남중 수, 14기의 배명국·이종구·박정기, 15기의 고명승·김상구·이진삼·민병돈, 16기의 최평욱, 17기 김진영·허화평이 그들이다.
11기 회원 중 손영길과 정호용·최성택·박갑룡은 창설회원은 아니었다. 12·12에 참여한 백운택은 너무 과격하고 개성이 강해 끼여주지 않았다. 손영길은 박정희 대통령의 5사단장시절 부관을 했고 엘리트코스인 수경사 30대 대장을 전 중령보다 앞서 했다. 『손영길이 늦게 들어온 것은 박 대통령을 모신 경력으로 든든한 빽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전두환 쪽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박대통령은 어려울때 자신의 부관을 했던 손을 총애했으나 5·16때 육사생도 지지데모를 이끌어낸 전을 능력 면에서 더 인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하나회원 L씨의 회고).
12기의 3박(박준병·박세직·박희도)이 하나회에 들어온 것은 이들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던 60년대 말에서 71년 무렵이다. 창설후 회장인 전두환은 기별 선두주자로 조직을 수시로 정비·보강했다. 17기의 허삼수는 67년께에 들어왔고 16기의 장세동은 68년 가입했다. 전 회장이 직접 구성한 하나회 멤버는 21기까지였다. 21기 이후는 전대통령이 직접 손때를 묻혀 뽑지 않았다.
하나회가 커지면서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 중 일부가 재고 다니는 바람에 전체가 노출되고 무임승차하면서 과실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도 생겨 모임의 순수한 동기가 퇴색했다』고 주장하는 초기회원들도 있다.

<정호용씨 나중 가입>
윤필용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하나회는 70년대 후반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면서 12·12때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전면 재정비됐다. 13기의 선두주자인 최세창(3여단장), 14기의 정도영(보안사보안처장), 16기의 김정룡(특전사 보안부대장)이 가입한 것은 12·12 이후였다. 최여단장은 전대통령과 함께 미국 포트베닝 기지에서 레인저 트레이닝코스를 함께 갔다왔지만 하나회와는 거리를 두고 야전 쪽에서만 있었다.
정도영 처장은 12·12때 육본측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대통령은 그를 보안사에 계속 남겨 군 내부를 관찰케 했다.
전 대통령은 5·17과 민정당 창당과정에서 실력을 보인 권정달 대령을 하나회에 가입시키려 했으나 그의 동기인 15기 회원들이 반대해 좌절됐다. 『대통령선배의 지시라도 회원 신규 가입시 전원일치 합의정신은 유지돼야 한다는게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이때쯤부터 전대통령은 하나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가 거리를 둔 이유 중 하나로 한미관계를 들 수 있다. 12·12직후 8사단 16연대장 이병합 대령(현 보훈처장)은 미국 측에 12·12의 불가피성을 해명하고 미국내의 여론과 반응을 파악하라는 전 보안사령관의 특명을 받았다.
70년 중반 베시 주한 미군사령관의 부관을 했던 그의 워싱턴 파견은 당시 위컴사령관 과 의 불화를 뚫기 위한 전 사령관의 고육책 중 하나였다.
미국은 전 사령관을 견제하면서도 그가 하나회가 아닌 범정규 육사출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주한미군과 CIA 서울지부는 윤필용 사건이래 하나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병합 대령의 귀국후 보고도 비슷했다.
미국의 시각을 파악한 전 사령관은 예비역·현역을 가리지 않고 정규 4년제 육사출신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자신의 동기생인 11기에 대한 교통정리부터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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