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면에서 계속>전 대통령" 정치-군 분리" 11기 관리 나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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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는 하나회의 정호용에게 군대를 맡기면서 나머지 대장자리는 비 하나회에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과정에서 불만을 나타낸 사람이 노태우와 최성택이었다. 전대통령은 먼저 노 보안사령관에게 옷을 벗고 정치를 하라고 권유했다. 보안사가 만든 민정당의 사무총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노 사령관은 『군대에 남겠다』며 거절했다. 노 사령관은 정치 쪽의 역할이 탐탁지 않은데다 「2인자 처신」을 하기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한 듯했다.

<"육참총장 까진 안돼">
그러나 전대통령은 정호용이 육참차장을 하고있고 노 사령관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자 별을 하나 더 달아 81년7월 대장으로 예편시켰다. 다음은 신군부 핵심 K씨의 회고.
『전대통령 후임으로 노 사령관이 오자 그의 존재는 커 보였지요. 전대통령은 그런 노 사령관의 존재가 너무 커진 보안사의 힘을 빼는데 귀찮았을 겁니다.
후계자로 양성하기 위해 정치훈련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군복을 벗겼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그러나 노 사령관을 군대에 남겨놓으면 참모총장을 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가 하나회를 관리하면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참모총장까지 한다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있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김복동도 육사교장을 끝으로 82년1월 중장으로 예편한데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 쪽에선 그가 10·26때 경호실 작전차장보인 만큼 이재전 차장과 함께 옷을 벗어야하는 것이 당연한데 중장까지 시킨 것만으로도 배려해준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두환·노태우·김복동 3인의 관계와 관련해 K씨는 흥미 있는 기억을 하고있다.
『노는 초급장교에부터 잘 알려진 대로 전에게 깍듯했습니다. 전과 김복동이 영관급 시절사이가 나빠졌을 때 항상 노는 처남인 김을 감싸지 않고 전편을 들었습니다. 부인 김옥숙 여사도 이순자 여사 쪽에 편을 들었지요. 김 여사는 올케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은 처남·매제사이보다 친구의리를 중시하는 듯한 노를 항상 기특하게 생각했지요. 6공들어와서 그것이 허구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전까지 전은 피가 반드시 불보다 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전두환과 김복동 간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간 것은 선두주자로서의 경쟁심에다 여러 가지의 사연이 겹쳐 작용했다. 대령시절 전 대통령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다 발뒤꿈치 인대가 끊기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때 『전 대령은 이제 군대생활이 끝났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는데 전 대령은 음해의 진원지로 김 대령을 꼽았고 둘은 사이가 틀어졌다.
12·12당시 『군의 정치개입은 있어선 안된다』고 전소장의 참여제의를 김복동 소장이 거절했다는 주장에 대해 전 장군 쪽에선 코웃음 친다.
『그를 처음부터 끼여주지 않았으며 그는 그만한 인물이 못된다』는 것이다.
노 사령관이 민정당 총장을 맡지 않음으로써 그 행운은 비 하나회원인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돌아갔다.

<음해진원지로 지목>
전 대통령은 처음 동기생인 권익현에게 맡기려 했으나 이번에는 청와대의 허화평·허삼수 수석이 반대했다. 두 허씨로선 하나회의 정통선배인 권익현을 다루기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권정달의 총장기용에 이어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중정차장보 시절 그 밑에 있어 하나회의 반대쪽인물로 분류됐던 이종찬이 원내총무가 됐다.
전대통령은 권익현씨에 대해 뭔가 빚을 지고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윤 장군사건으로 예편한 11기의 손영길·권익현 중권은 하나회의 비밀을 끝까지 지켰다고 전 대통령은 생각했지요. 손은 그런지 않다고 보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뒤를 봐주지 않았지요.』(L씨)
최성택을·중장으로 예편시킨 것은 그가 병과문제(포병)도 있지만 하나회와는 거리를 둔
다는 표시였다. 최 중장도 73년 11기의 선두로 장군에 진급한 4명중 하나다.
이기백 소장이 국보위 운영위원장이 되고 1군단장·육참차장·2군사령관·합참의장이 된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는 장군진급을 동기생 중 3차 연도에 할 정도로 늦었다. 전 사령관은 국보위 이미지 관리와 전체 육사출신이 참여한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순수 야전에서만 근무했고 인간성이 좋다는 평판을 받아온 그를 운영위원장으로 끌어왔다. 그의 대장진급은 충남출신(연기)으론 건국이래 처음이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이상훈은 본래 「반 하나회」의 중심인물이다. 경기고 출신 (충북 청원)인 그는 박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 쪽에서 밀어줬고 하나회에 아주 비판적이었다.

<「야심 없는 사람」인정>
그러나 12·12로 대세가 결정 나면서 하나회의 실체를 인정하고 정규육사의 대단결이란 명분에 적극 협조했다. 그의 중용은 반 하나회 세력의 포용이었다.
정호용 대장은 야망과 거리를 둔 행동이 거꾸로 그를 총장에 앉혔다고 할 수 있다. 12·12직전 대구 50사단장을 하던 그는 간혹 옷을 벗겠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군복무에 매력을 잃고있었다.
그는 12·12다음날 합수본부 측에 달려온 것도 사태전말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진종채 2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비정치적 처신을 했다. 그런 점을 전 대통령은 「야심 없음」으로 인정하고 총장으로 기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총장을 할 때 전대통령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화제가 됐지요. 그렇지만 전대통령은 항상 「정호용이는 나보다 한 수 아래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에 처음엔 용인했지요.』(전 대통령측근 Z씨).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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