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소리 못내고 있는 한은/심재찬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신경제 1백일계획은 물가안정의 바탕위에서 경제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어 이 계획 자체가 물가를 자극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활성화 과정에서 혹시라도 물가불안의 징후가 감지될 때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만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김명호총재가 지난 12일 한은 창립 43주년을 맞아 한 기념사의 한 구절이다. 물론 맞는 이야기이나 어떻게 보면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현경제팀이나 정책에 맞부닥치지 않고 지내자는 입장을 드러낸 것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중앙은행의 1차적 목표가 통화가치의 안정을 통한 물가안정이라면 한은의 요즈음 통화관리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 돈은 넉넉히 풀리는데도 시중자금이 제조업 등 생산쪽으로 가지 않고,기업들이 여유자금을 6개월씩이나 잠겨두는 기업금전신탁이 올들어 4조원이나 늘어나 잔액이 11조원에 이르고 있다. 여러곳에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 돈을 풀어 금리를 낮추고 투자심리도 부추기자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제대로 풀려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 중앙은행은 마땅히 제 목소리를 내 할 소리를 해야한다. 그럼에도 한은이 한 일은 고작 실세금리가 오르지 못하도록 올초부터 중단했던 금융기관에 대한 창구지도의 부활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은은 시중은행들이 창구지도,가계대출 억제,예금과 대출맞끄기 등을 들어 통화관리의 원칙이 없다고 불평하자 「시중은행은 늘 그런다」며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카터 대통령시절 미국에선 우리의 경제장관회의 같은 회의를 하고 나오는 당국자에게 기자들이 물어보면 『오늘도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번스의 경제학강의만 들었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서 번스는 공화당의 닉슨대통령시절 임명된 미 중앙은행 연준위의장으로 민주당 카터정부에서도 자리를 계속지키며 고집스럽게 바른 소리를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명호총재는 23일로 취임 1백일을 맞는다. 김 총재가 한은내부에서 「동남아 중앙은행 총재회의를 멋있게 치렀다」,「한은의 주차질서를 확립했다」는 정도의 평가에만 만족하지 말고 고민하는 중앙은행총재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것은 기자혼자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