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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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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림=김태헌

으음, 엄마는 오늘 낮술을 마시기로 했어. 지난해에 아들을 대학에 보낸 친구가 주최하는 낮술 모임에 갈 거야. 지난해에 그 애 아들이 시험을 보는 날, 그 애가 거북해 할까봐 문자만 한 통 보내고 전화를 하지 않았더니, 아마 다른 친구들도 그랬나봐. 그날 너무 심심했다나? 수험생 엄마 주제에 다른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심심해! 하고 말하기도 왠지 어색하고… 그랬대. 그래서 이번 해에는 다들 모이기로 했어. 그리고 오랜만에 처녀 때처럼 낮술을 마시기로 했어.”

나는 엄마를 따라 웃었다. 역시 우리 엄마다웠다. 엄마가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솔직히 엄마가 교문에 엿을 붙여놓고 기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내 마음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수능 시험을 마치고 교문을 나왔다. 교문 밖에는 엄마들이 우르르 몰려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찾았다. 교문 입구에서 엄마가 나처럼 목을 길게 빼고 나를 찾고 있었다. 남극의 어느 해변, 펭귄들이 해변을 가득 뒤덮으며 새까맣게 몰려 있을 때 나는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은 펭귄들 사이에서 모두가 제 새끼를 찾아갈 수가 있는 걸까? 그런데 그날 나는 알았다. 비슷비슷한 우리들이 몰려나와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엄마들은 각자 자신들의 아이들을 찾아낸다는 것을. 아마도 외계인이 탄 비행접시가 오늘 한국의 상공에서 우리들을 찍어갔다면 그들만의 프로그램인 ‘코스모스 지오그래픽’이란 프로그램에서 우리들을 두고 신기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외계인 소녀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 엄마에게 물을지도 모른다.

“엄마 저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라는 종족의 뇌 속에는 본능적으로 초능력 감지기가 있나 봐. 내가 보기엔 다 똑같이 생겼는데 잘도 자기 새끼들을 찾아내고 있어. 난 지구의 새들이라는 종족이 먼 거리를 철 따라 정확히 운행하는 것보다 저게 더 큰 초능력이라고 생각해.”

엄마의 입술은 추위 속에서 오래 서 있어서인지 파르스름했다. 나를 보자 엄마는 무슨 에베레스트에서 내려오는 딸이라도 맞듯이 약간은 걱정스럽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춥다 어서 차에 타자” 하며 나를 끌었다.

“술 먹었다면서? 운전할 수 있어?”

내가 묻자 엄마는 차에 올라타 두 손을 비비더니 말했다.

“아이구, 아줌마들하고 내가 그런 약속을 한 게 잘못이지. 낮술은커녕 점심도 못 먹었다. 참 나… 지네들이 애태운다고 자식들이 시험을 잘 보느냔 말이야. 그래서 엄마 그냥 다니엘 아저씨랑 밥 먹었어. 소주 딱 한잔 했어. 그리고 친구들한테 문자를 보냈지. 나 혼자 술 먹는다 얘들아…. 그랬더니 문자들이 오더라구. 그래 너 잘났다!”

엄마는 한참을 웃었다. 엄마의 친한 친구들 중 두 명이 올해 나와 함께 수능시험을 봤다. 엄마가 가끔 하는 말로 그 애들은 아주 공부를 잘한다고 했다.

“엄마가 이건 정말인데 너한테 고맙더라구. 그 애들은 밥도 못 먹었대. 점수 1, 2점에 대학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엄마로 말하자면 아주 편안했어.”

내가 뉴질랜드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한국 학교에 전학해서 고입 시험을 볼 때, 엄마는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자격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친구들에게 한턱을 냈다고 했다. 엄마 친구들의 아이들은 이미 전교에서 1, 2등을 하면서 일류 외국어 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말이다. 엄마 친구인 아줌마는 나중에 그 일을 회상하면서 내게 말했다.

“맛있는 거 얻어먹으면서 말이야. 약간 기분이 이상했단다. 위녕, 한턱을 낼 사람은 우리들이었는데, 네 엄마는 우리들 중에 네가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처럼 기뻐했고, 우리들은 왠지 너희 엄마가 행여라도 주눅 들까봐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센 경쟁을 거쳐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는지 자랑도 못했단다.”

그러자 엄마는 대꾸했었다.

“너희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지만 위녕은 다른 걸 잘해. 으음…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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