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6·10항쟁/빛 잃는 6·29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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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민주화운동 시작과 끝” 평가역전/1년전 시각과 딴판… 민주계 허탈
6·10항쟁을 기념해 10일 청와대에서는 김영삼대통령이 당시의 주역들을 초청해 그날을 회고하며 오찬을 같이 했다.
민주당에서는 기념식을 갖고 사진전·강연회를 개최했다.
반면 민자당은 이날 아침 간단한 논평만 내는 모양갖추기에 그쳤다.
○민자 기념식 무산
민주당이 6·10에 대해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범민주세력의 승리』라고 규정하고,김 대통령이 『더 이상 민주주의를 폭력으로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국민의 승리』라는 비슷한 의미를 부여한 반면 민자당의 논평은 『6년전 민주함성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말로 대신했다. 6·10을 「폭력에 대한 투쟁이나 저항의 승리」라는 등의 의미부여는 슬쩍 비켜간 것이다.
당초 민자당내 민주계의 한 당직자는 6·10 기념일을 하루 앞둔 9일 당차원의 기념식을 건의했다.
대통령까지 정통성의 기반으로 강조한 이 날을 여당이 그냥 넘길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민주계인 당직자들은 떨떠름해 했다.
당내 민주계와 좌장인 황명수 사무총장이 보선지원에 나서 당에 없는 가운데 기념식 제의는 묵살됐다. 대신 대변인 논평만으로 마지못한듯 「민주화운동」이라는 입발림만 하기로 했다.
민자당,특히 민주계의 소극적인 태도는 6·10을 높이 평가할 경우 6·29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6·10과 6·29는 87년 민주화항쟁의 시작과 끝이라는 동일선상에 놓여있으면서도 성격이 전혀 다르다.
당시의 민주화운동을 6·10으로 상징할 때 민주화의 공은 김영삼대통령을 포함한 야당과 재야 등 운동권의 몫이 되지만 6·29로 상징하면 공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6공정부의 몫이 된다.
적어도 새 정부 출범전까지의 87년의 민주화는 6·29의 공이었다. 6·29는 6공정부의 모태였기에 매년 기념행사를 통해 뜻이 기려졌다. 반면 6·10은 반정부세력의 시위를 통해서만 기념되는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6·10은 민정당의 대통령후보로 노태우후보가 확정된 전당대회날에 맞춰 벌어진 반대시위였기에 6공으로서는 당연히 악몽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6·10과 6·29의 위상이 뒤집어졌다.
새 정부의 실세인 김덕용 정무장관은 9일 『6·10은 소련과 동구 등 세계적인 변혁을 선도한 역사적인 사건』 『재야나 운동권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참여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같은 맥락에서 6·29는 『6·10항쟁의 결과물』 『6·10이 있었기에 6·29가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김 장관은 이에앞서 지난 5일에도 6·10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면서 『6공 5년간 6·10으로 얻은 성과를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의 실현 등 개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허송한 것이 안타깝다』며 6·29와 함께 6공 자체까지 평가절하한 적이 있었다.
김영삼대통령 역시 자신이 처음으로 닭장차에 실려가는 수모를 당했던 6·10을 「민주화의 전기」로 높이 평가하면서 『당시의 정신이 바로 오늘 살아흐르고 있다』는 말로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6·10에서 찾았다.
○“고향잃은 느낌”
이같이 6·10의 「승천」에 따라 퇴색하는 6·29를 보는 민자당내 민정계는 고향을 잃은듯 허탈해 한다.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한 새 정부의 역사재평가 때와는 또다른 허탈감이다. 적어도 12·12는 5,6공의 뿌리였다고 할수 있다하더라도 대다수 민정계 의원들이 직접 관여한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29는 6공의 상징이었고,민정계 의원이면 누구나 6·29를 칭송해 마지않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시에 6·10전후의 지긋지긋한 시위를 「불법」 「폭력」이라고 개탄한 기억도 생생하다.
청와대에서 당정관계자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29 5주년 평가보고대회」를 대대적으로 갖고 『6·29는 통치철학과 국가경영의 기본이념』 『6·29는 민주국가 기반을 다진 원동력』이라고 칭송했던 것이 불과 1년전 이맘때였다.
○깊어가는 이질감
한 민정계의원은 『6·29선언에 동참했던 우리가 어떻게 6·29를 무시하는 6·10에 박수 칠수 있느냐. 「6·10 민주화항쟁」이라는 말조차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이질감을 털어놓는다.
또다른 의원은 『6·10이 6·29선언으로 마무리 되었기에 민주화운동이 될수 있었던 것』이라며 오히려 6·29가 「진짜 민주화」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새 정부의 역사 재평가로 새 정부의 성격은 갈수록 뚜렷해진다.
하지만 갑작스런 평가의 반전으로 새 정부의 색깔과 다른 성향인 비민주계의 이질감도 함께 깊어가는 듯하다.
『5년뒤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는 한 민정계의원의 말처럼 5년뒤 또다른 성격규정이 있을수도 있다.
아직 6·10과 6·29는 역사라기보다 현실정치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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