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타협 모르는 "검은 우디 앨런"|스파이크 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방화·외화를 합쳐 1년에 4백여 편에 가까운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양적인 풍요는 자칫하면 무분별한「영화소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 영화를「대중오락」의 영역이상으로 끌어올린 주요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그들의 최신작을 중심으로 집중 조명한다.【편집자 주】
「꿈의 공장」할리우드는 그 화려한 외면으로 수많은 영화팬들을 열광시켜 왔다. 그러나 이 겉모습을 한 꺼풀 벗기면 거기에는 적지 않은 그림자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미국 사회 어느 곳보다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라도 흑인에겐 진지한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다. 흑인으로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은 기껏해야 코미디언밖엔 없다.
독립영화 출신의 젊은 흑인감독 스파이크 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재능 있는 신인이 과연 인종적 장벽을 얼마나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지난해 말『말콤X』를 완성시킨 시점에서 말하자면 그의 할리우드 진출은 일단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흑인감독으로서의 희소성 때문에 높이 평가된다고 해서는 곤란하다. 각본·제작·연출에다 직접 출연까지 하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활약은 그를 우디 앨런이나 존 카사베테스에 비견할 만한 재목으로 인정방게 한다. 또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선의 통제하에서 만든다는 그의 완전주의 적인 면모는 그에게「검은 우디 앨런」이라는 애칭을 선사한다.
『말콤X』의 극장 개봉과 바로 전 작품인『정글 피버』의 비디오 출시는 국내에서도 스파이크 리의 진가를 새삼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두 작품의 매력은 인종문제라는 심각한 주제를 전투적인 선동 성이나 도덕주의 적인 엄숙성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데 있다.『말콤X』는 너무나 유명한 흑인 민권운동가의 전기영화다. 스파이크 리가 만든 가장 야심적인 작품이라 할 이 3시간 20분 짜리 대작은 한 영웅의 전설적인 행적에 대한 추앙으로 가득 찬 설교조의 전기영화가 아니다. 흑인 빈민 출신의 말콤 리틀이 백인 흉내나 내는 길거리의 건달에서 감옥생활을 거쳐 성실한 흑인운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인간의「변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전한다. 떠들썩한 무도회 장면의 뮤지컬 적인 처리에서부터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암살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표현형식을 총동원해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91년에 만든『정글 피버』는 사회 파 감독으로서 상당히 이색적이게도 연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연애는「사랑의 힘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가 아니다. 유능한 중견 흑인 건축가와 빈민 출신이탈리아계 여인과의 사탕을 소재로 그들 남녀가 각기 소속인종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하는 단순히 사탕의 불가능성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의 대립이 빚어내는 갈등을 대단히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빛난다. 스파이크 리는 1957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재즈 뮤지션인 아버지와 대학강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애틀랜타의 무어하우스대학을 졸업하고 뉴욕대학 영화학과에서 대학원을 마친다. 흑인으로서는 드물게 지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일찍부터 소형영화로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어「신동」대접을 받았다. 86년 17만 달러를 들여 만든『그녀는 그것을 가져야만 해』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그는 이 영화가 예상을 뒤엎는 히트를 기록함으로써 크게 주목받게 된다.
흑인문제를 보는 그의 시각은 대단치 비타협적이다. 이는 지난해 LA폭동 때에도 그가 흑인들의 소요를 지지한다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한국인에 대한 악의적인 묘사다. 영화『똑바로 살아라』에선 영어를 못하는 한 한국인 슈퍼마켓 주인을 등장시켜 그를 돈밖에 모르는 대단히 저능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임재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