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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법률 산책] 해적법에서 배우는 기업 지배구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호 13면

티머시 제이 오브라이언
미국 뉴욕주 변호사·김 & 장 법률사무소

디즈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면 해적법이 언급된다. 포로로 잡힌 해적은 해적법에 따라 자기를 생포한 해적선의 선장과 석방조건을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으로 그려진다. 해적의 세계란 무법천지고, 갈고리 손의 잔혹한 해적 선장이 포로와 부하 해적을 맘대로 죽일 것 같은데 법을 갖고 있다니….

해적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있었다는 것은 영화 속의 허구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의 한 교수가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카리브해의 해적들은 해적선이나 해적선단 단위로 일정한 내부 규정을 제정해 시행했다고 한다. 문명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에서 더구나 법원이나 정부 기관에 호소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민주적인 제도와 정밀한 지배구조를 발전시킨 것이다.

해적선의 특징은 선장이 절대적인 지휘통솔권을 갖지만 선장이 임무를 부여하거나 선원을 처벌할 때, 또 약탈품을 분배할 때 공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해적들은 권력분립의 개념을 사용했다. 전투·항해 시에는 선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지만 일상적인 운영에 있어서는 조타장이 견제권한을 갖는다. 선장과 조타장은 선원들이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선출한다. 그리고 선장은 “해적법규를 준수하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취임선서를 했다. 선장이 신뢰를 잃으면 탄핵당하고 새 선장이 선출됐다.

선장이 단독으로 선원 처벌을 결정할 수 있지만, 다수결 방식에 따라 선원들의 추인을 받아야 했다. 노획품을 나눌 때 선장·간부의 몫은 일반 선원의 두 배를 넘지 않았다.

그 외에도 해적법은 다양한 규정을 담고 있다. 카드놀이를 할 때 사기 금지(어떤 경우에는 일체의 도박 금지), 오후 8시에 모든 촛불을 소등하고 그 시간 뒤의 음주는 갑판에서만 허용, 여자를 몰래 배에 태우는 것 금지(위반 시 사형), 정숙한 여성에게 폭력 금지 (위반 시 사형), 팔다리를 잃으면 보상금 지급, 전투 중 음주 시 처벌 등등….

해적법의 민주적 제도는 해적이 창궐하던 17세기 영국이나 다른 나라의 해군과 비교된다. 해군의 선장은 배 안에서 신적인 존재로서, 선원들의 생활과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처우에 있어서도 해적들이 해군 선원들보다 나았다.

해적선의 지배구조는 현대 회사의 기업 지배구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공개 기업의 중요한 문제는 CEO(또는 최대 주주)와 소수 주주 간의 이해충돌이다. 대개의 회사는 CEO가 영국 해군의 선장처럼 회사의 모든 영역에 대해 광범위한 권한을 갖는 ‘해군 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해적들의 예에서 볼 때 권한 배분에 다른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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