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독 영화 진수 "만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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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괴테와 베토벤의 모국 독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로는 거의 기억될 것이 없는 나라다. 한국에서 아직도 프랑스영화가 고급스러운 예술영화의 전범처럼 인식되는 통념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빔 벤더스의 영화가 그나마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독일영화로는 제일 친숙한 편이지만 그것을 통해 독일영화 전반을 얘기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의 영화는 현대 독일영화가 보여준 다양한 영화적 모험의 중요한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 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7일까지 열리는「뉴 저먼 시네마1」은 이 생소한 독일영화로 접근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폴커 쉴렌도르프·라이너 마리아 파스빈더·베르너 헤어조그·빔 벤더스 등 독일 영화작가 4명의 대표작 10편을 소개하는 이 행사는 제목 그대로 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독일영화 신세대들의 고투의 자취를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한때 미국영화에 비견할만한 영향력을 세계에 떨쳤던 독일영화는 2차 대전 이후 왕년의 영화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다. 값싼 미국영화가 대량 유입되면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독일영화 하면「얼치기 에로영화」로 통하는 지경에 몰리게 된다. 뉴저먼 시네마는『아버지세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하고 등장한 일군의 젊은 영화작가들의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미국장르영화에서 익힌 감수성과 진보적 정치적 상상력을 결합시킨 이들의 영화는 70년대 초반 유럽의 유수한 영화제를 여럿 석권하면서 독일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일거에 끌어올렸다. 전통과의 단절에서 출발한 이들의 영화작업은 제대로 된 문화적 축적이 없는 우리에게도 영화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탐색하는데 일정한 시사를 준다.
18일 오후4시 상영한 파스 빈더 감독의『4계절의 상인』(71년작)은 영상자료원 시사실의 1백석 남짓한 객석을 가득 채우는 성황을 이루어 영화팬들의 높은 관심을 입증해주었다. 36세로 요절한 파스빈더에게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선사한 이 작품은 주위의 몰이해로 죽음에까지 이르는 한 불행한 사나이의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기대로 삶의 방향이 어긋나버린 주인공 한스. 그는 외인부대에서 돌아온 후 경찰관으로 근무하나 그마저 창녀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유로 파면 당하고 과일행상을 하면서 산다. 그의 아내는 그를 돈버는 기계정도로 생각하고 그는 날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누구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 끝에 죽음을 택한다. 극장에서 개봉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상자료원의 기획프로그램들은 앞으로도 더욱 확충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사실의 낡은 설비는 영화적 감동을 반감시킨다.
특히 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음향설비는 거의 최악.『연간 8억원에 불과한 예산으로는 시설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영상자료원 관계자는 말한다. 좋은 영화는 좋은 여건에서 보여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이곳의 시설개선은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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