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당·황순원 문학상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제7회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의 최종심 후보작 지상 중계를 시작합니다. 시인과 소설가가 들려주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 예심 심사위원의 해설 등을 모아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올해는 누가 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상을 차지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십시오. 연재 순서는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순입니다. 

아마도 고형렬 시인은 2006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한 해 동안 그는 문학상 세 개를 잇달아 받았다. 개중엔 백석문학상도 있었다. 시인이 20년 동안 시집을 만들었던 곳이 상의 주체였다. 창비, 그래 시인은 창비에서 청춘을 보냈고 이태 전 창비를 나왔다.

비로소 백석문학상을 받던 날, 시인은 “평생 무상(無賞) 시인이 되지 못하고 이 상을 받는다. 모든 시인들에게 고개 숙인다”고 남다른 수상소감을 말했다. 고형렬은 유독 상복이 없는 시인이었다.

또 여름이 왔다. 올해도 고형렬이란 이름은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 명단에 올랐다. 그는 해마다 유력 후보로 언급됐고 해마다 떨어졌다. “해마다 죄송합니다”며 말문을 열었더니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좋잖아”라며 느긋이 웃는다. 늘 이런 식이다.

올해 추천작으로 예심위원이 1차 선정한 결과를 시인은 흡족해 했다. ‘조금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 달개비의 사생활 2’를 시인은 “쓰고 나서 기분이 좋았던 시”라고 소개했다.

우선 달개비란 식물을 알아보자. 달개비는 습지에 사는 한해살이풀이다. 이맘때 비취색 꽃을 피우고, 잎은 길쭉하다 못해 가느다랗다. 잎사귀 폭이 2㎝ 정도에 불과하다. 눈 밝은 시인은 고운 때깔의 꽃잎이 아니라 볼품없는 잎사귀에 눈길을 매어두었다. ‘아무리 수많은 햇살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어도/내게 필요한 면적은 다만 나의 잎사귀 형상뿐’라고 읊을 수 있었던 건 오랜 관찰 끝에 깊은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시인은 작고 미세한 것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미토콘드리아 따위의 세포 구성물을 시인은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거기에서 시인은 존재 안의 무엇, 그러니까 존재를 구성하는 또 다른 존재를 궁리했다.

올해는 지난해와 또 달라 보인다. 자연을 말하는 시편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내용은 사뭇 철학적이고 불교적이다. 문태준 예심위원의 말마따나 “무량한 바깥 세계를 인식하는 건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개비에게 빛은, 가느다란 잎사귀를 온전히 덮을 정도면 족하다. 더 이상의 햇빛은 달개비와 무관한 세상이다. 이 대목에서 체념의 정조가 읽힌다. 자신이 처한 바를 깨닫고 자신의 몫만 감당하려는 자의 결의 말이다.

“이 작품은 ‘조금’의 시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행 ‘잠깐 여보세요, 조금만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에서 ‘조금만’이 품는 뜻은 결코 조금에 그치지 않습니다. 조그맣게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이며 당신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배려의 마음입니다.”

시인은 영 무심한 표정이었다. 삶의 보잘 것 없음을 진작에 알아버린 것인지, 세속의 온갖 욕심을 내려놓기로 작정한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조금’ 짐작할 따름이었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너와 나의 관계’ 집요한 추궁
논란 부른 예심 최고 화제작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설 맨 처음과 마지막 단락, 그리고 세 번째 장에서 약간의 변형과 함께 반복되는 ‘올해에도 나는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휴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란 문장을 온전히 이해한 건, 소설을 꼬박 네 번 읽은 다음이었다. 권여선은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딱히 사건이랄 게 없는 소설이다. 소설은 N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나’의 독백으로, N을 향해 내뱉는 온갖 저주와 경멸의 말로 가득하다. 그러면 나는 종래 N을 떠나는 데 성공하는가. 그걸 이해하려고 네 번 읽었다.

대식증에 시달리는 나와 거식증에 걸린 N은 대학 때부터 붙어다녔다. 사람들은 이 둘을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면전에서 말하곤 했다. 그러나(아니 그래서) 둘은 늘 함께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다. 대학 내 모든 관계 속에서 나와 N은 배제됐다. 하여 둘이 맺는 모든 관계는, 둘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했다. 나와 N은 한 덩어리의 반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다. 술에 취한 나는 N에게 상처를 남겼고 N은 나하고만 맺던 관계를 다른 곳으로까지 확장했다. 남자들을 만났고 밤새 영화를 봤다. 그렇게 N은 나를 떠났다. 그래서 나는 결투신청을 계획한다. 결투신청은 긴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N과의 관계를 영원히 끊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나’ 한 명뿐이다. 하나 ‘나’가 서 있는 시제가 수시로 이동한다. 현재였다가 과거였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나’의 상상 속 장면도 슬쩍 끼어있다. 그걸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았다. 작가에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느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일단, 왜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 뒤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권했다.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자. 분홍색 제복을 입은 거구의 여직원이 있다. 일견 정상은 아닐 수 있다. 그녀를 살게 하는 유일한 의지는 결투에의 의지다. 결투를 포기하면, 비대한 몸뚱이에서 살과 기름을 빼고 세상에 날렵하게 합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과의 화해를 경멸한다.”

앞서 소설 내용을 상세히 적어놓은 건 이 작품이 예심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문제작이기 때문이다. 몇몇 심사위원은 열렬히 환호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해를 못했다”고 털어놓은 심사위원도 있었다. 한참의 토론 끝에 권여선만이 할 수 있는 문학적 시도를 높이 사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강렬함과 고의적인 미숙함 때문에 권여선을 읽는다”(김미현 위원)는 평은 그래서 나왔다.

소설은 여러 층위로 읽힌다. 나와 N과의 관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여 동성애로 읽히기도 하고 자아의 분열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읽히던 별 상관은 없다. 권여선은 늘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여선을 찾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