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캘린더] 앤서니 카로 '야만인들' 조각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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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특별하기보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현대 미술계가 손꼽는 조각가 앤서니 카로(80)는 5년 전 차를 타고 지나던 런던 거리 구석에서 번쩍이는 환영을 보았다. 만물상 앞에 나와 있는 말 모형이 그의 눈을 치고 들어왔다. 문명 세계 한 모퉁이에서 거친 몸짓으로 힘을 뿜어내고 있는 말 형상은 조각가 머리에 콘스탄틴 카바피의 유명한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광장에 모여 무엇을 기다리는가/오늘 야만인들이 온다네/(…)/야만인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나/그들은, 야만인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는데."

앤서니 카로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에 걸쳐 작업한 '야만인들'(사진)은 오늘날 우리가 잊거나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명 이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말 모습을 닮은 뜀틀 상 위에서 창을 겨누거나 활을 만지고 있는 무사들은 바람같이 들판을 가르며 천리 만리를 한 걸음에 달려가는 옛 풍광을 불러온다. 카로에게 야만인은 늙고 차가운 현대 문명에 새 호흡을 불어넣을 환기창으로 다가왔다.

9일부터 2월 29일까지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앤서니 카로-야만인들'은 팔순을 맞고도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고 있는 카로의 근작전이다. 지난해 런던과 뉴욕에서 선보여 화제를 몰고 온 '야만인들'과 그의 최근 작품 변화를 살필 수 있는 90년대 후반작 5점이 나왔다. 7점의 연작으로 이뤄진'야만인들'이 눈길을 끈 까닭은 철과 돌을 짜맞춘 추상조각으로 일관했던 카로가 구상으로 방향을 트는 징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전시 준비를 위해 서울을 찾은 카로의 아들 폴 카로(46)는 대가의 이 큰 작품 변화와 한국전이 흥미로운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년에 이르러 얻은 작가의 표현 자유, 전시장 하나를 꽉 채우는 장관의 재미와 유희성, 약동하는 한국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에너지." 02-2124-897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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