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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실크 로드’ 2500km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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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26면

1. ‘명사산’. 수만 년 풍화작용을 거치며 모래가 산을 이룬 천혜의 아름다움. 명사산 매표소에서 받는 입장료는 80위안(약 1만원).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는 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 비단길의 교통 중심지인 서역(西域)이 더 이상 아니다. 이제는 중국 대륙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소수민족 자치구이자 떠오르는 신흥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현대의 실크 로드에서는 동서 문물 간의 교류를 통해 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지하에 매장되어 있던 태고의 흔적, 화석연료를 캐내 살아가고 있다. 드넓게 펼쳐진 누런 황무지 군데군데에는 연방 고개를 끄덕이는 석유 시추기가 있다.

굽이굽이 오를 듯 내릴 듯 솟아있는 모래언덕을 힘겹게 올라서는 쌍봉 낙타의 등짐에는 수북이 쌓인 비단 대신에 무거운 관광객의 엉덩이가 자리하고 있다. 그 하나를 얻으려 수천㎞를 왕복해야 했던 갖가지 기묘한 장신구들은 기념품 상점에서 누구든지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값싼 물품이 되어버렸다. 또한 비행기표 한 장이면 과거 현장법사가 몇 달간을 힘들게 거쳐왔던 서역길을 단 두세 시간만에 완주할 수 있다.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찻길도 항상 열려 있기에 굳이 힘들게 오랫동안 걸어다닐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해 약 1300년 전의 서역인들이 행해온 모든 어려운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지금에 와서 더 이상 과거의 불편함을 답습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옛 걸음과 자취를 밟으며

2. ‘카라쿠리 호수의 아이들’. 세계의 지붕이라 할 파미르 고원에 있는 청정호수, 카라쿠리 호수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아이들. 3. ‘위구르족 소녀’. 중국인보다 인도나 중동 사람에 더 가까운 모습에서 소수민족 자치구에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4. ‘위구르족 아이들’. TV도, 컴퓨터도 없는 아이들에겐 마을 구석구석이 모두 놀이터였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곧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현장을 옛 모습 그대로 체험해야 한다. 우리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실크 로드 탐방팀’은 그런 역사적 마음가짐을 단단히 챙겨 들고 먼 길을 떠났다. 현대의 실크 로드를 거짓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실크 로드의 첫 번째 관문이었던 둔황(敦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후 10여 일 동안 계속된 장장 2500㎞의 버스 여행은 과거 신라의 고승 혜초 스님이 오천축국(五天竺國)을 향해 걸어온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섭씨 6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무더운 열기 아래에서, 한 손에는 물병을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천년의 흔적을 파인더에 담기 위해 분투하는 23명의 사진가들은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장의 구도(區都)인 우루무치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밤하늘에는 온통 시커먼 어둠이 가득했지만, 낯선 이국 땅에 도착했다는 젊은 호기심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노출 따위는 문제없다는 듯 모두들 카메라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다음 날에는 곧바로 둔황으로 달려가야 했기에 모두들 일찍 잠을 청했다.
하늘에는 새도 없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의 흔적조차 없는 주위에 오로지 자신의 그림자뿐인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울퉁불퉁한 둔황의 사막도로를 달리고 달리면서 보았던 황량함은 그 가혹한 열기와 수십 년의 세월 동안에도 변하지 않았던 한(漢)의 장건이 지켜온 절개와 신념 그 자체였다. 무더위로 녹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학우들은 한 장이라도 더 좋은 사진을 만들고자 자신만의 느낌으로 장건의 노력을 뒤쫓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속에 살아 숨쉬는 실크 로드

이윽고 힘겹게 도착했던 사막의 오아시스 투루판, 오래전 현장법사는 이곳에서 융성하던 불교 국가 고창국에서 크게 환대를 받았다. 십 년 후 이곳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그때는 당나라에 의해 왕국은 멸망하고 잔해만 남아 있었다고 했다.
황갈색의 무던한 암석 더미만 남아 있던 고창 고성에서 우리가 느꼈던 것도 현장법사가 생각했던 아쉬움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고창국과 더불어 또 하나의 불교 국가로서 번성했던 구자국, 투루판과 쿠차에는 이제 불교 문화가 아닌 이슬람 문화가 융성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중국의 한화 정책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모두의 사진 촬영에는 세월의 무상함 따윈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당도한 카슈카르. 파키스탄 외 3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신장 지역의 변방인 이 도시는 실크 로드가 끝나기 직전 마지막 고비인 파미르고원을 넘어가려는 여행자들을 배웅하던 곳이었다. 탐방기간 동안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버스 안에서 소요한 학우들에게 이 도시는 마치 지나온 먼 길의 마지막 이정표와도 같았으리라. 그만큼 느끼는 것도 많았고 사진으로 담아낼 것도 많았다. 톈산(天山)산맥의 끝자락에서 실크 로드 탐방팀 학우들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지금 한국에 와서도 그 순간순간을 기록한 사진 속에 여전히 생생히 남아 있는 듯하다. 우리는 실크 로드가 희미한 역사 속 유적이 아니라 여전히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문화의 통로임을 확인했다.

고된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보다 학생들을 먼저 챙기셨던 임영균 교수님, 학생들보다 더 학생 같았던 젊은 느낌의 이인성 조교님, 일정 동안 모든 잡무를 도맡아 봉사했던 팀장 정의 선배,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코피가 쏟아져도 끝까지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준현이 형, 교수님께 가장 열렬한 사진가로 인정받은 민희 선배 등 23명의 탐방팀 학생과 함께했던 십여 일간의 실크 로드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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