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아이

아베의 반성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1. 아, 맙소사. 이런 참패를 기록하다니. 돌이켜보니 난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착각했습니다. 난 보수정치의 원류인 고향 조슈(長州)의 혼을 이어받아 헌법을 개정하고 기존 교육을 ‘애국심 가득 찬’ 교육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개헌의 주춧돌인 ‘국민투표법’을 만들었습니다. 또 일교조(전교조 격) 교사들이 꽉 잡고 있는 교단을 개혁하기 위해 60년 만에 교육기본법을 뜯어고쳤습니다. 근데 국민이 진정 원한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은 연금이 왜 줄어드느냐, 소득 격차는 왜 커지는가에 있었습니다.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외면하고 ‘조슈의 신념’을 더 중시했던 거죠. 22일 도쿄 긴자(銀座) 네거리에서 유세 중 나는 머리에 과자 부스러기 세례를 받았습니다. 1993년 정치 입문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2. ‘스타 총리’의 뒤를 잇는 건 힘든 일이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 이야기입니다. 그가 날 2인자로 키워 준 것은 고맙지만 어떻게든 그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공격수’ 고이즈미와의 차별화를 위해 너무 ‘수비’에 치중했습니다. “자민당을 깨부수고, 구태의연한 관료 조직을 타파하고, 경제를 확 개혁하겠다”는 고이즈미의 스타일을 ‘허풍’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연금 파동 때도 난 “대책을 빨리 마련해 철저히 개선하겠다”며 허튼소리 한마디 안 했습니다. 고이즈미라면 “그놈의 사회보험청 공무원들. 그래서 내가 관료를 뜯어고치려는 거다”고 버럭 화를 냈겠죠. 안 되겠다 싶어 나도 뒤늦게 흉내를 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고이즈미의 말은 허풍이 아니라 신뢰의 메시지였습니다.

 #3. 내가 너무 물렀나 봅니다. 책임을 묻고 자를 건 잘라야 했는데 그걸 못했습니다. 끝까지 버티지도 못할 것을 욕만 먹고 시간만 질질 끌었습니다.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됐다 자살한 마쓰오카 전 농림수산상, 그 뒤를 이었지만 최근 또다시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려 있는 아카기 농림수산상 모두 내가 만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의 핵심이었습니다. 차마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카기 장관의 부친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 재임 시 방위청 장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적이 있는 분” “직무에 필요한 분”이라고 옹호했습니다. ‘인간 아베’와 ‘총리 아베’를 분간하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4. 내공이 부족했습니다. 지난주 TV토론에서 질문자가 내 발언 중 툭 끼어들자 “내가 말하고 있을 때 좀 얌전히 해라. 시청자들은 당신 말보다 나의 말을 원하고 있을 게다”라며 ‘욱’하고 말았습니다. 툭하면 외조부와 부친 이야기를 들먹인 것도 착오였습니다. ‘도련님’ 같은 인상만 국민에게 남기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사석에서 들려준 “총리가 되면 아베 신조일 뿐이다. 자신의 생각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라는 충고가 이제야 가슴을 파고듭니다.

 참의원 선거를 나흘 앞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대신해 써 본 ‘대리 반성문’이다. 하지만 말이 ‘대리’이지 대부분은 아베 총리와 그의 측근에게서 실제로 나오고 있는 자성의 이야기들이다. 또 대다수 일본 국민이 취임 10개월을 맞은 아베에게 냉정하게 매긴 ‘성적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29일 선거는 자민당의 참패가 유력하다. 그러나 아베 측은 벌써 “설령 참패해도 총리 직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오히려 “총리를 그만두면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레드카드’를 ‘옐로카드’로 치부하건 말건 그건 아베의 마음이다. 그러나 외국 자본은 오히려 그의 반성문보다 일본 국민의 현명하고 냉정한 한 표에 더 높은 평가를 하지 않을까.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