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돋아난 「공명선거 싹」/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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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권의 기생충들』『이 시대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OO당은 잡탕이요,△당은 지역당』『달이 밝으면 공연히 멍멍거리는 짐승이 있다』
중앙선관위가 13,14대 총선과 대선 유세장에서 수집한 말들이다. 「정치는 정치」라며 국리민복을 외치된 후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11일 부산 낙동국민학교에서 열린 사하구 보궐선거 유세풍경은 과거와는 판이했다. 후보들간의 욕설과 험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어깨띠를 두른 선거운동원들의 구호나 연호도 없었다. 피킷·플래카드의 나부낌도 없었다.
운동원들이 연단앞 노루목을 선점,지지후보의 말마디마다 환호하는 소연함도 없었고,그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썰물처럼 유세장을 빠져나가는 김새는 장면도 없었다.
청중들도 흥분하지 않았고 후보별로 갈라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후보들에게 야유대신 고른 박수를 보내주었다. 청중들에겐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넘쳤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동원된 군중이 아님을 알렸다.
이날 유세는 후보들의 덕담으로 시작됐다. 『건투를 빕니다』『선전하십시오』『우리 한번 멋지게 해봅시다』 등.
후보들은 이어 청중앞으로 나가 손을 마주잡은채 치켜들었다. 공명선거 결의를 다진 것이다. 그 다음은 차분한 논리의 대결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의 측근인 여당후보는 『이번 선거는 김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며 『대통령이 계속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어야 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민주당후보는 『김 대통령이 개혁을 더 잘하고,더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여당 일색인 부산에도 야당의 씨앗이 뿌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정당·무소속후보들은 『정치에 새바람을 일으키려면 무엇보다 참신한 인재가 국회의사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은 「녹수 갈 제 원앙 가듯」 후보·운동원·청중들이 공명선거 분위기조성에 손발을 척척 맞춘 뜻깊은 날이라고 해도 좋을듯 싶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뿐이다. 모처럼 돋아난 파란 싹을 소중히 가꾸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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