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9>내가 치른 북한숙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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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남노당파 제거가 시작됐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정확히 52년초부터였다.
박헌수부수상이 자동차를 빼앗겼다는 소문이 당정 일부 고위간부들사이에 나돌기 시작했다.
이를 귀동냥한 고위간부들은 『외무상등을 겸직하고 있는 부수상이 자동차 없이 걸어서 출· 퇴근을 하고 있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라며 수군거렸다. 워낙 극비리에 추진된 사업이라 대부분 간부들이 전후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부터 수상실의 분위기를 알고 있는 터여서 드디어 올 것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진행과정을 주시했다.
외무성의 소련파간부에게 물어보니 「자동차와 기름등 전쟁물자를 최대로 절약하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박부수상의 전용자동차도 차고에 세워 놓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기관에는 당의 이같은 지시가 전혀 없었는데 유독 외무성에만 떨어진 것은 누가 보아도 석연치 않은 조짐이었다. 부상(차관)급인 내각간부학교장이던 나도 전시중이었지만 전용승용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러 정보채널을 가동해 배경을 알아봤더니 예상대로 남노당파 제거를 위한 전초전으로 우선 박헌수부수상이 자파 세력들과 「공작」을 하지 못하도록 그의 발을 묶어 두는 1단계 조치였다.
훗날 나는 소련으로 돌아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비극의 혁명가 박헌수부수상의 친딸 박비바안나씨를 만나 이같은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그녀는 박헌수의 첫 부인 주세죽씨(53년말 모스크바에서 병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49년 여름 그녀가 아버지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연회석상에서 그녀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녀는 『52년 봄 남동생을 낳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던 평양의 새 어머니가 「지금 평양의 정가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너의 아버지와 김일성 사이가 좋지 않다. 김일성이 아버지의 자동차를 빼앗고 탄압하고 있다」며 평양의 분위기를 전해 주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떠올리며 새어머니에게 『분위기가 그렇다면 평양에 돌아가지 말고 모스크바에서 함께 살자고 붙잡았으나 새 어머니는 「외로운 아버지를 혼자 두고 나 혼자만 모스크바에서 살 수 있겠느냐. 김일성의 총밥이되더라도 평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혁명사업을 도와야 한다」며 평양으로 돌아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회고했다.
박헌수부수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기 한달여 전인 51년 말, 김일성수상의 오랜 비서 문일이 돌연 소련으로 귀국했다.
그의 귀국을 놓고 평양 정가에선『박헌수부수상과 밀통하다 들통이나 추방됐다』 『수상의 사생활 비밀까지 너무 깊숙이 알아 강제추방됐다』『여자관계가 복잡해 스스로 달아났다』 등등 온갖 추측들이 무성했다.
이런 소문이 난무했던 이유는 문일이 해방후 하바로프스크 88정찰여단에서 김일성대위와 함께 입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김일성공화국」 을 창출한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련 귀국후 카자흐공화국 알마타에 가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소련파제거때 첫번째 덫에 걸려 망명한 정률동무와 함께 문일비서를 찾아갔다. 우린 평양시절의 이런저런 얘기끝에 베일에 싸였던 그의 귀국동기를 물어봤다. 그는 약간 당황해 하면서 『총총한 정신으론 「양심선언」을 할 수 없다』연거푸 독한 보트카를 몇잔 들이킨 후 말문을 열었다.
『51년 가을이었습니다. 김일성수상이 갑자기 배가 아파 주치의인 소련의사를 불렀지요. 그러나 2시간이 지나서야 주치의가 수상관저에 나타났습니다. 화가난 수상이「왜 늦었느냐」고 묻자 그 주치의는 「자동차가 낡아 시동이 걸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수상동지는 나에게「이 자에게 당장 새 자동차를 지급하라」고 지시하더군요. 당시 나의 자동차도 약간 낡은 것이었지요 . 내 자동차를 주치의에게주고 새 자동차를 내가 타고 다녔습니다. 새 자동차도 역시 소련에서 들여온 같은 차종이어서 수상동지가 눈치챌 수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또 수상동지가 배가 아파주치의를 불렀는데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문비서가 준자동차도 헌 것이어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수상동지는 나에게「새 자동차를 지급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나는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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