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공작정치는 죽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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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제14대 총선 사흘 전이던 1992년 3월 31일 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앞길. 불법선거 감시 순찰을 돌던 민주당 청년 당원들이 우편함에 유인물을 쑤셔 넣던 30대 남자 4명을 붙잡았다.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들이었다.

 “민주당 홍사덕 후보에겐 숨겨 놓은 딸이 있다. 여자관계도 굉장히 복잡하다.” 유인물은 그런 내용이었다. 저열한 공작정치에 여론은 분노했다. 선거판은 뒤집혔고 열세였던 홍 후보는 승리했다. 3당 합당을 한 뒤 거대 여당을 꿈꾸던 민자당은 149석을 얻어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아마 공작정치가 응징 받은 후련한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정의가 언제나 승리하는 건 아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공작정치의 최대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야당 때 사저인 동교동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도청을 우려해서다. 미행과 협박·매수 등 군사정권 때의 공작 정치는 만만치 않았다. 민주화 세력은 “이 끔찍한 공작정치를 타파하자”고 울부짖었다. 그런 만큼 적어도 이들이 집권하면 공작정치는 끝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DJ 정권 말기인 2002년 대선 때도 공작정치는 기승을 부렸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 밑에서도 공작 정치는 살아남았다.
 대선을 6개월쯤 앞두고 느닷없이 ‘의인 김대업’이 등장했다.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97년 대선 때 이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 관련 기록을 파괴하고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이회창이 미국에 갔을 때 최규선씨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한 민주당 의원도 있다. 나중에 거짓말한 사람들은 재판 받고 유죄가 확정됐지만 그래 봐야 이미 선거는 끝난 뒤였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은 행복한 후보였다. 공방은 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주변에서 머물렀다. 공약에 대해서건, 국가관과 미래 비전에 대해서건 언론은 노 대통령에 대해선 변변한 검증을 하지 못했다.

  올해 대선은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이해찬 전 총리가 “이명박과 박근혜는 한 방이면 간다”고 자신했지만 그게 이번엔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던 것 같다. 국정원이 ‘이명박 조사팀’을 만들었다고 하고,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최태민 조서’가 흘러 다니는 걸 보면 말이다. 이번에도 정부와 여당은 “우리가 뭘?”이라며 발뺌을 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것도 있다. 한나라당이 화를 자초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당의 경쟁후보 뒷조사를 해 다른 당에 자료를 넘긴 게 사실이라면 한나라당은 앞으로 어떻게 여당의 공작정치를 비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박근혜 후보 쪽에선 “문제가 된 마포팀은 1000개나 되는 외곽 지원단체 중 하나”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실망스럽다. 이런 게 박 후보 측의 대응 방식인가. 공작정치의 피해자인 홍 전 의원에게 묻고 싶다. 캠프의 선대위원장으로서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유권자 입장에선 이명박 후보 측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무조건 “재산 의혹은 나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솔직히 그런 해명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지금껏 한나라당 이·박 후보의 지지율은 합치면 60∼70%나 됐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 밥그릇 싸움만 하는 여권 후보들을 생각하면 한나라당이 이번 대선에서 지는 것 자체가 이변이다. 하지만 부잣집 형제들끼리 싸우다 집안 망해 먹은 게 드문 일도 아니다. 많은 사람은 “이번 대선은 초반부터 너무 싱겁다”고 생각했었다. 속단 마시라. 아마도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