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사학위 딴 한국계 혼혈 3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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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시베리아대륙 깊숙한 불모의 오지 야쿠티아에 한인들이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남조선에서 오신 김 선생이디오. 나 노재두 올시다.』
호텔 방에서 전화를 받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조선…」이라면 북한에서 쓰는 용어인 만큼 북한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라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다급할수록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편에서 내 방으로 들이닥치게 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로비로 내가 나가는 편이 안전하겠다고 판단되어 로비에서 기다리면 내려가겠다고 했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전화를 건 노씨는 이 나라 문화부에서 내게 보낸 통역이었다. 노씨는 어제까지 나의 통역을 맡았던 유네스코 직원이 시간을 더 이상 낼 수 없어 대신 통역을 맡긴 했지만 자신도 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앞섰던 노씨와의 만남은 작년 8월 야쿠츠크에서 열린 국제샤머니즘학회 참가 때의 일이다.

<한국을 고려라 불러>
노씨는 연금으로 살아가는 연금생활자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얼마 전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물건을 사다가 야쿠츠크에 갖다 파는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는데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도 하바로프스크에서 물건을 많이 사와 서둘러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지만 고려사람이 왔다기에 반가워서 통역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사는 한인들은 한국을 「고려」라 부른다. 노씨를 더 붙잡을 수 없어 로비에서 앉은 그대로 그가 이곳까지 와서 살게된 유랑의 편력사를 듣기로 했다.
그의 이름은·노재두, 올해 67세다. 고향은 전북 익산군 함열면 시나리 입석마을. 1939년 호남일대가 흉년이 들자 노씨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고향을 등진 것이 함남 신고산까지 떼밀려가게 되었다. 신고산에서 6년 동안 막일을 하며 살다 구 소련 어업생의 노무자로 징발되어 흑룡강생의 타다르스키와 사할린 어양으로 돌아다니며 일을 하게되었다.
매우 추운 곳이어서 어양은 여름에만 열려 겨울에는 어장관련 임업소에서 일을 했다. 계약기간이 끝난 1949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소련당국이 보내주지 않아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정착했다. 여기서 한국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러나 노씨는 배운게 없고 별다른 기술도 없어 살길이 막연하자 당시 아파트 건축공사가 한창이던 야쿠츠크 공사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하바로프스크에 혼자 남은 첫 아내는 자기 길을 찾아 떠났고, 노씨는 현재 두 번 째 아내와 살며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두 번 째 아내는 1880년께 러시아에서 야쿠츠크로 이주해온 러시아여인과 한국인 남자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그녀는 한국계 러시안 혼혈이지만 한국어는 전연 모른다.
노씨의 외딸은 의과대학을 나와 이곳 야쿠츠크 종합병원에서 의사로 일한다. 사위는 중앙아시아 태생인데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 했다.
노씨의 말에 의하면 한국남자와 러시아 여인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혼혈이 이곳 야쿠츠크에 괘 많이 살고 있다. 한인들은 2세 교육에 열심이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만 3명이나 되고, 그들은 병원이나 지질연구소등에서 일을 하며 잘 산다고 했다.
그러나 노씨는 고생을 많이 해 억울하다면서 소련의 자유화이후 탄원서를 제출해 공민권은 얻게 됐지만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수 없고 집을 넓힐 수도 없다고 푸념했다.

<중류층 생활 즐겨>
한국남자들이 금을 캐기 위해 노다지의 꿈을 안고 집단으로 이곳 야쿠티아에 온 것은1910년께. 이들 가운데 7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야쿠티아 여인들과 결혼해 야쿠츠크에서 남쏙으로 멀지 않은 바다이보라는 곳에 집단촌을 이룬게 이곳 한인역사의 시초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2세들은 바로 야쿠티아에 동화됐다.
현재 야쿠티아 사회과학원언어· 문학· 역사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인 아가피아 여사(44·철학박사)는 금을 캐러왔다 바다이보에 눌러앉았던 한국남자의 계녀다. 아가피아 여사의 조부는 그녀의 어머니가 7세 때 사망했다.
한인들이 모여 살던 집단촌은 야쿠츠크에서 서쪽으로 90km떨어져 있는 남치 라는 곳에도 있었다. 인구 7천명 가량의 읍 근교였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후예들 15명이 읍내에서 살고있다.
그곳의 한인 후예들은 엔지니어·교사·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중류생활을 하고 있다. 남치에 살던 한인 1세들은 농사일을 하며 집단촌을 이루었으나 그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 후예들은 뿔뿔이 흩어져 야쿠티아족으로 흡수됐다. 남치 근교에 모여 살던 한인들 역시 금을 캐러왔다 눌러앉은 사람들이다. 금을 캐러왔던 한국인 3세 아가피아 여사는 야쿠티아어·노어에는 능통하지만 한국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고 영어도 통하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내가 찾고 있는 야쿠티아의 무속을 찾는데 열중했다. 그녀와의 의사 전달은 통역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녀가 꼭 가야할 데가 있다고 해서 저녁초대를 받아 간 곳이 야쿠츠크 시내에 사는 한인가정이었다.
텐 엘라 라는 이름을 가진 41세의 한국 여인이 아파트의 문밖까지 나와 나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역시 우리말을 못했다.
식탁에는 흰쌀밥과 된장국·김치·고추장·오이·풋고추·고사리 나물등 낯익은 한국음식이 풍성하게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시베리아에 와서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우리 음식이었다. 우선 김치부터 한 쪽 입에 넣으니 말고기를 먹던 입안이 개운해진다.
엘라씨의 장녀 결혼식이 있어 마침 그의 친정어머니인 올가남 씨(59)가와 있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영어를 할 줄 아는 모스크바출신의 언어학자가 통역으로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남씨가 노어를 섞어가면서도 한국어를 곧잘 해 우리말로 의사를 통할 수 있는 자리가 됐다.
남씨에 의하면 자기 이름은 원래 남월례인데 소련 식 이름으로 바꾸면서 올가 남이 됐다는 것. 남씨는 손녀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나홋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동안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씨는 손녀가 한국의 혈통을 찾아 한인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랐으나 저희들끼리 연애하여 야쿠티아 남자와 결혼한 것이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이 말을 눈치챘는지 엘라씨는 어머니인 남씨를 통해 딸에게 한국 남자와 결혼하라고 설득했지만 밥도 먹지 않고 며칠을 울어 하는 수 없이 야쿠티아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모녀의 이 말속에서 그들이 이역만리 남의 땅 시베리아에 살면서도 우리의 혈통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련 이름 올가 남으로 통하는 남월례씨는 소련의 국수리스트라는 곳에서 한국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평양 근처의 부령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8세 되던 해에 한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은 뒤 남편과 사별했다. 어머니는 그 후 하바로프스크에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여기서 두 번 째 남편 남씨를 만나 재혼했다. 어머니가 전 남편에게서 낳은 큰딸은 물에 빠져죽었으며, 재혼하여 낳은 딸 7명 가운데 6명도 어려서 모두 죽고 남월례 씨만 살아남았다.
남씨는 타이피스트·봉제공·농장일꾼 등을 전전하던 중 18세에 한국인 정씨를 만나 결혼하여 딸 다섯,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3년 전에 죽었고, 딸 다섯은 모두 출가했는데 현재 나홋카에서 87세 된 어머니를 모시고 막내딸과 함께 산다.
큰딸 엘라는 야쿠츠크에 살고, 넷째 딸은 카카시에 살며, 나머지 딸들은 나홋카에 사는데 사위들이 모두 한국인이라고 남씨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니까 남씨가 한국 교민 2세, 그의 딸들이 3세, 이번에 결혼한 손녀딸이 4세가 되는 셈이다. 시베리아에서 용케도4세까지 한민족의 혈통을 지키다가 5세부터는 마침내 야쿠티아족과 피가 섞이게 된 것이다.

<2세교육에 열중>
엘라씨의 소련 이름 가운데 텐은 아버지의 성 정에서 따온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로 가서 중등학교를 마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 교민과 결혼했다.
그녀는 한국인 밑에서 수지침을 배워 현재 야쿠츠크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그녀를 찾는 환자는 하루 평균 2O명. 그녀의 수지침은 불면증이나 기타 만성질환에 효험이 뛰어나 그녀의 명성을 듣고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저녁초대를 받았던 날도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으러온 러시아 여인 2명이 그녀의 집에 묵으면서 수지침을 맞고 있었다.
엘라씨가 야쿠츠크에 살며먹는 된장·간장·고추장·고춧가루 등은 나홋카에 사는 어머니 남씨가 때때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한국말은 잊었지만 한국인 고유의 식성은 잊지 않아 이곳 시베리아의 야쿠츠크까지 한국 된장· 고추장을 운반해 먹고 있었다.
금을 캐러왔다 돌아가지 않은 한인1세의 손녀 아가피아 여사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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