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선빚는 「경제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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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실명제 일정 5월제시」 후퇴/「2단계 금리자유화」도 연기/부총리·박 수석 알쏭달쏭 “수사”/정부정책 신뢰성에 손상입혀/“안정보다 경기회복이 먼저다”/뒤늦게 청와대서 「조율」 나선듯
철저한 준비없이 일단 기세부터 드높이고 보았던 정부의 경제개혁의지에 예상대로 초장부터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말한적은 없다”
이경식부총리는 15일 기자들과 만나,『오는 5월중 실명제 추진일정을 제시하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다』고 밝혀 지난 3일 과천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주재한 경제장관회의후의 「5월중 실명제 일정 제시」 발표를 거둬들였다.
또 역시 지난 3일 「빠르면 3월중」으로 발표됐었던 2단계 금리자유화 시행시기도 최근 슬그머니 3월 이후로 연기됐고,그 과정에서 재무부 등 관계부처는 금리자유화시기가 3월중으로 굳어져 발표된 과정을 내부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부총리의 실명제에 대한 발언은 자칫 알쏭달쏭한 「수사」로 전락할 수 있다.
앞으로도 부총리가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은 정부의 공식방침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 금리자유화는 실명제와는 달리 몇달 미룰 수도 있고,또 그러다가도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지 바로 시행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이미 모든 금융기관이 3월중 금리자유화를 전제로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슬그머니 시행시기를 미룸으로써 정부 정책의 신뢰성에 적잖은 손상을 주었다.
그러나 실명제나 금리자유화의 일정을 둘러싼 이같은 혼선을 단순한 「수사」나 「변덕」으로 보고 치우기는 어렵다.
○사전조정 못해
그같은 혼선이 빚어진 알짜 이유는 「거시경제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이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것보다 먼저다」라는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뜻이 처음부터 제대로 전달되어 「사전조율」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뒤늦게 「개입」하기 시작했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과천에서 경제장관회의를 가졌을 때만 해도 청와대경제수석실의 진용은 제대로 짜여져 있지 않은 엉성한 상태였다.
각부처도 차관급 후속인사가 나오기 전이라 일을 단단히 거머쥐기가 어려웠다.
또 2·26개각 이후 주요 경제부처 장관과 박재윤경제수석이 몇차례 만났지만 그 정도의 회동으로 3일의 경제장관회의에 대한 충분한 조율은 이뤄질 수가 없었다.
○구체언급 안해
3일의 경제장관회의직후 「실명제 일정 5월 제시」가 발표됐었을 때부터 박 수석은 곧바로 『실명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떻게 실명제 문제가 거론됐느냐』며 노골적으로 언짢아 했고,「3월중 금리자유화 실시」에 대해서도 관계부처 장관들과 만나 자리에서 『경기 상황을 보아 무리』라는 의견으로 제동을 걸었었다.
결국 청와대측의 이같은 「사후조율」이 정책의 혼선과 부총리의 「수사」를 불러온 것인데,정부 출범 초기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경제의 회복과 개혁의 추진이라는 양날개를 함께 펼쳐야하는 새 정부로서는 적잖은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박재윤수석은 16일 『실명제를 가능한 한 조기에 실시한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다만 5월중 일정을 제시한다는 것은 잘못 전달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금리자유화라면 또 모르나 실명제에 관한한 박 수석의 이같은 확인도 얼마든지 「수사」가 될 수 있다. 화폐개혁에 대해 누구든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쨌든 실명제와 금리자유화를 둘러싼 최근의 혼선과정에서 확인된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새 정부가 개혁에 앞서 경기부터 회복시키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뚜렷이 갖고 있다는 것이고,또 하나는 실명제의 일정을 제시하고 단계를 밟아 실시할 것인지 아니면 「특단의 조치」로서 사전 예고 없이 실시할 것인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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