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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헤어진(?) 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한 남자에게 어느 날 새 실내복이 생겼다. 당장 해어진 옷을 벗고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책상이 허름해 보였다. 책상을 교체하자 이번엔 의자며 시계가 못마땅했다. 결국 그는 방의 모든 집기를 바꿨다.

'나의 옛 실내복과 헤어진 것에 대한 유감'이란 수필을 통해 밝힌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의 경험담은 새 물건을 갖게 되면 그에 걸맞은 또 다른 것을 사고 싶어지는 욕구를 가리키는 '디드로 효과'란 말을 낳았다.

이때 혼동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다. 예전의 실내복을 표현한 '해어지다'와 그 옷을 버림으로써 느끼게 된 감회를 적은 글에 나오는 '헤어지다'다.

"승려들이 일상복으로 즐기는 납의(衲衣)는 헤어진 옷을 수십 년간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이 누비옷의 기원이 됐다" "폐포파립(蔽袍破笠)은 헤어진 옷과 부서진 갓이란 의미로 초라한 차림새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처럼 쓰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모두 '해어진'으로 고쳐야 한다.

'헤어지다'는 "친구들과 쇼핑만 하고 헤어지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두 연인이 끝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살을 앓았더니 입 안이 다 헤어져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와 같이 '흩어지다, 이별하다, 살갗이 터져 갈라지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닳아서 떨어지다'는 말은 '해어지다'가 맞다.

이들 단어를 줄여 "입술이 헤져 아파 보인다" "발가락이 드러날 정도로 운동화가 해졌다"처럼 '헤지다' '해지다'라고도 쓸 수 있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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