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총선 지휘 예고'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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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초.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바닥을 길 때였다. 김원기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을 찾아갔다. "빨리 입당해 주십시오. 이대로는 당이 뜨기 어렵습니다."

盧대통령의 답은 싸늘했다. "입당한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에서 알아서 하셔야죠." 남 얘기하듯 했다.

그로부터 두달반 뒤인 12월 31일. "대통령이 선거에서 어디까지 하는 게 불법이고 합법인지 선관위에 물어 보고 싶다."(본지 1월 3일자 1, 6면) 盧대통령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면서다. 지휘봉을 잡겠다는 뉘앙스였다. 4일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 부부와 한 청와대 오찬에선 "대통령도 정치인이다. 입당 의사는 확고하다"고 말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핵심 참모의 설명은 이렇다. "우선은 (당이)자생력을 갖춰야 하고, 그런 다음에 (대통령이)도와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판단이다. 대통령의 무관심이 열린우리당의 자생력을 키워주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盧대통령은 3일 국정토론회에서 장관들에게 올 한 해 동안 혁신의 속도를 배가해 달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盧대통령의 국정운영 구상은 모두가 총선 이후로 잡혀 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러자면 2003년 한 해는 헌집을 허무는 데 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본인이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대선자금을 파헤치려는 것도 모두를 무너뜨리려는 물귀신작전이었다는 설명이다. 이호철 민정비서관은 "집권 1년을 왜 이렇게 험한 길로 돌아왔겠는가. 기존의 잘못된 질서를 허물어야 새 시대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폐허 위에 새집을 짓겠다는 발상이다. 계기는 총선 말고는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盧대통령은 배수진을 치려 한다. 결국은 '양강구도'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 열린우리당 이강철 상임중앙위원은 "대통령이 움직이기 시작한 후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양강구도가 분명히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총선에서 盧대통령이 생각하는 목표의석은 1백석에서 1백20석 정도"라고 주장했다.

◇깨질 곳은 깨지고, 흡수될 곳은 흡수된다=이런 목표 의석수는 야당의 내부적 변화 가능성을 계산해 나온 것이라고 한다. 최근 盧대통령도 참석한 자리에선 이런 농담이 오갔다. "한나라당이 갈라지면 당명은 어떻게 되나." "(의원별 4등급 평가를 빗대)한쪽은 한나라AB당, 다른 한쪽은 한나라CD당."

청와대 관계자는 "민주당도 열린우리당이 가능성을 보이면 그대로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총선 후 정계개편론=盧대통령은 최근 만난 인사들에게 빼놓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한나라당에 의회 권력이 다시 넘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얘기다.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핵심 인사는 "만약 총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과반 확보를 위한 정계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며 "떨어져 나온 한나라당 세력이 됐건 민주당 비동교동계가 됐건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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