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론] 2004년에 묻는다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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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연말 정부는 올해 정부가 추진할 최우선 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정했다. 꼭 일년 늦은 대응으로 생각된다. 2002년 말 대통령선거 직후 필자는 모 일간지에 '보이지 않는 실업' 이라는 제목으로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새 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무엇보다 일자리 창출을 가장 중요한 정책목표로 설정해 범 정부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을 조언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는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등 이상론만 펼치다 지난해 환란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를 초래했다.

실업문제 때문에 경기회복이 쉽지 않음은 일반 국민도 피부로 쉽게 느낄 수 있었는데 정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환란 이후 지난 6년간 대학을 졸업한 3백만명의 젊은이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구조조정 한파 속에 일자리다운 일자리를 찾은 젊은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들이 앞으로는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가? 신용불량자 대부분이 바로 일자리가 없는 이들 청소년이 아닌가? 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가 마련되지 않는 한 경기회복은 요원할 것이다.

경기회복이 쉽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고령화의 빠른 진전과 중장년층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 증폭이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재 직장에 근무하는 중장년층도 앞날에 대한 불안이 커 도무지 소비를 예전처럼 할 수 없다. 우선 일자리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극히 일부분의 국민(공무원.사립학교 교직원 등)을 제외하고는 연금이 너무 적어 퇴직 후 생활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는다. 더욱이 몇 년 사이 금리도 크게 낮아져 이자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니 어찌 소비를 늘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장년층은 장년층대로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를 할 수 없으니 우리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정부나 연구소들의 계속되는 진단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너무 간과한 이야기다. 지난해에는 수출이 나름대로 호조를 보여 3% 내외의 경제성장을 겨우 이뤘으나 수출이 언제까지 이렇게 호조를 보일지 확실치 않다.

최근 기업들은 격화되는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인력을 줄이는 등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의 확대로 기업들의 인력 수요는 근본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노조는 구조조정과 해고를 막기 위해 필사의 투쟁을 하니 어느 기업가가 새로운 인력을 쓰려고 하겠는가? 12%의 노조 가입 근로자가 자신들의 자리 유지와 복지만을 위해 투쟁할 때 나머지 대다수 근로자는 일자리 얻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노조 지도자들이나 정책당국은 정말 모를까?

시간이 별로 없다. 다른 어떤 정책보다 우선 노.사.정 간의 대합의가 필요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노사관계인데 다른 제도나 정책을 단편적으로 아무리 바꾸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많은 동료 근로자를 위해 노조 지도자들이 앞으로 '5년간 불파업 선언'을 할 수는 없을까? 노조가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다면 기업가들은 '5년간 고용안정'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노사 간에 이렇게 화합하는 분위기가 마련된다면 기업가들은 계획했던 해외투자를 국내로 다시 돌릴 것이고 일자리도 늘릴 것이다. 외국인 투자도 다시 쇄도할 것이고 우리 경제는 비상할 것이다.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국회.시민단체 등 온 나라가 올해 함께할 일은 바로 이러한 노사 간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건설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식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일하고 싶은 모든 국민이 안정된 직업을 가질 때 진정한 '더불어 사는 사회'의 건설이 가능할 것이다.

구본영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