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식 그르친 JP의 「둔사」/노재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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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슬 퍼렇던 박정희대통령 시절,JP(김종필 현민자당대표)는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을 남겼다. 남들이 「서울의 봄」이라며 들떠있던 80년 그는 또 「춘래불사춘(봄이되 봄같지 않음)」이라고 말해 배경을 아는 이들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그런 명구들은 격조와 함축성,뛰어난 예견력을 지니고 있었다.
24일 민자당대표최고위원실에서 김종필대표가 한 발언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못해 의아하게까지 느껴졌다.
전날 민주당과 「용공음해」 시비에 대해 유감표명을 하기로 약속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선유세중 선거라는 상황과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진의가 아닌 이야기들이 나오는 가운데 김대중 전민주당후보와 민주당이 감성적으로 상해를 입었다면 결코 우리의 본의가 아니었으며 퍽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김 전후보는 정계를 떠난 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있을리 만무하며 있어서도 안된다… 민주당 여러분은 우리 당의 양해를 받아들여… 극히 건전한 정책대결로 우리와 더불어 신한국 영위에 협조·견제해 국리민복에 이바지하길 바란다… 국민들도 우리의 참됨을 이해해 주고 지켜 보아달라.』
하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말뜻이 알쏭달쏭하다. 「감성적 상해」,우리당의 「양해」,신한국 「영위」,게다가 김대중씨의 정계은퇴와 용공시비는 무슨 연관인지 도무지 헷갈린다. 두고 볼 것도 없이 「둔사」의 표본이다.
민주당이 반발한 것도 당연하다. 이기택 민주당대표는 25일 『그냥 「김대중씨는 용공이 아니다. 내가 잘 안다」고 하면 될 것을 공연히 모호하게 말해 우리한테까지 부담을 준다』고 짜증냈다.
이 대표는 또 『JP가 YS(김영삼대통령)와 원수졌나』라고 비꼬았다.
전날 양당간 합의에 대해 『왜 민주당의 생떼에 밀렸나』며 반발했던 민자당내 분위기도 JP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섰다.
『취임식에 재뿌렸다』『YS위해 총대멘다는 분이 총대를 어깨에 멨다 허리에 멨다 하다가 도로 당했다』『뭐대주고 뺨맞고』… 악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종필대표의 발언이후 박희태대변인이 두차례나 『그게 아니고…』라며 보충해명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초점은 「용공시비」에서 「약속위반」으로 옮겨졌고,민주당은 취임식과 본회의에 불참할 명분을 어느 정도 얻었다.
총칼 아닌 「말」로 하는 것이 문민정치일진대,그 「말」이 뒤틀려서야 제대로 령이 설 수 없다. 약속위반까지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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