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도 때를 잘 타야한다(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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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인선」은 그 발표가 미뤄지고 미뤄진 끝에 드디어 마지막 주까지 왔다. 인사가 이렇게 궁금증만 잔뜩 부풀린채 최후까지 미뤄지고 있는 것은 각료 인선은 총리의 제청이 있어야 한다는 헌법규정을 철저히 따르기 위해서란 설명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세간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인선에 너무 뜸을 들이는게 아니냐는 것이고,그렇게 공표를 늦추다보니 국민의 진은 빠질대로 빠졌다. 또 그만큼 인사의 부담은 더 커지게 됐다.
○뜸들이면 부작용 불러
인선의 발표가 늦어지는 것이 헌법규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밝히기라도 했어야 했다. 또 총리나 각료진의 인선은 그렇다 하더라도 비서진만은 설 직후나 늦어도 2월초에는 밝혀 새정부의 성격을 국민들이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해주었어야 했다. 모처럼의 인사가 비판과 잡음에 시달리는 걸 꺼려하는지 모르나 어떤 면에서 보면 그건 자신없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시기와 모함이라면 차기대통령이 보호해줄 수 있다. 청탁이 골치 아프다면 비서진용 스스로가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비판과 잡음은 여론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다음 인선의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늦춘다고 비판과 잡음이 영구히 예방될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인사에 대한 평가는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우리는 주요직들에 대한 인준청문회가 제도화되어 있지도 않은만큼 이른 요직인사를 통한 여론의 여과과정은 더욱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인사가 늦어지면서 항간엔 인사도 인사지만 전체 개혁의지마저 이렇게 저렇게 굴절되고 변질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아직 개혁의 확실한 윤곽이 잡히지 않고 있는 상태다. 어느 자리에선 안정을 강조하는가 싶더니 또 어느 자리에서는 「개혁없이는 안정도 없다」고 말해 헷갈리게 하고 있다. 개혁의 주체도 신한국위원회가 되는가 했더니 인수위원회가 그를 대신한듯한 인상도 주었다. 또 「당이 개혁작업을 주도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가 하면 「개혁은 내가 한다」고 말해 갈피잡기가 어렵다.
이러한 헷갈림은 김영삼 차기대통령이 개혁이 필요하다는 「감」은 잡았으되 구체적인 개혁의 프로그램이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강정책에서 선거공약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구체적인 개혁의 청사진이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발언도 좀더 가닥이 잡혔을 것이고 인선에도 「장고」가 필요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김 차기대통령은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정치인으로서는,특히 정치가 정석대로가 아니라 공작과 술수에 의해 전개되는 세월에서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과 후각이 논리보다 효용성이 클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음모적 정치의 영역에서 국가영역의 영역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지금은 감과 후각이 아니라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과 계획이 필요한 시점과 마당이다.
○웬만한 잡음 각오해야
오히려 오랜 정치생활에서 터득한 감과 후각은 국가경영의 영역에서는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나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김 차기대통령은 산전수전 다 겪어온 정치생활을 통해 절충과 타협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 있어선 그런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과감한 개혁작업이란 절충과 타협과는 정반대 성격의 것이다.
어차피 모두에 다 잘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개혁은 선택이다. 절충과 타협이 아니라 자를 것은 과감히 자르는데서 개혁은 성취될 수 있다. 또 개혁은 혁명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위로부터의 변화추구인만큼 대통령에게 그 성패가 달렸다.
김 차기대통령은 건강은 빌릴 수 없어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은 머리를 빌리는 일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빌릴 머리에 못지않은 지인지안이 있어야 머리를 빌릴 수 있다. 그는 지금 기득권층의 머리에 둘러싸여 있다. 빌린다고 빌린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기 십상이다. 이미 곳곳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그에 따라 개혁의 구상들도 힘을 잃어가는 현상이 속속 감지되고 있다.
○기대부푼 지금이 적기
이런 상황일수록 때를 잘 이용해야 한다. 개혁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지금 한껏 부풀어 있다. 이를 부담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해야 한다. 국민도 차기대통령이 우려하는 것처럼 변화와 개혁이 하루아침에 달성될 것이라고 기대할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맥을 잘짚고 방향을 잘잡아 흔들림없이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기다려 줄 것이다. 국민을 너무 지쳐빠지게 해선 안된다. 기대가 부풀대로 부풀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제어하며 개혁구상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적기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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