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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계 원주민의 해」특별기획시리즈|취직 안돼 막노동판 누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아이누 네노 안 아이누」.
일본 내에서 묵살된 민족 아이누들은 누구나 이렇게 자신들의 한을 되뇐다. 아이누어로「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애절한 바람이 이 말속에 담겨 있다.
지난해 여름 아이누사회에서는 가슴아픈 사건이 연이었다. 소리 없이 홋카이도(북해도)를 떠나 본토, 그것도 동경 한복판에서 막노동을 하던 장년아이누의「객사」사건이다.
7월27일 수은주가 34도를 오르내린 무더위에 42세의 아이누남자가 하수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쓰러졌다. 병명은 열사병.
홋카이도 동부 구시로시에 거주하는 그가 상경한 것은 사흘 전.
홋카이도에서는 돈벌이가 없어 막노동이라도 하기 위해 동경거리를 헤매던 그가 겨우 일자리를 찾은 1시간 뒤의 일이었다.
9월 어느 날 우에노 역 근처 한 골목길에 고바야시 아키라(39) 라는 이름의 아이누 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술이 잔뜩 취해 쓰러진 그의 사인은 급성간염. 그가 자주 다니던 병원의사의 말에 따르면 무리한 노동에 알콜 중독이 겹쳐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누 인으로는 드물게 고등학교까지 나온「엘리트」였으며 고바야시씨는 글을 잘 써 학교재학 중 생활수기에 응모, 노동상상까지 방은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취직이 안돼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아이누를 차별하는 사회를 비관, 술로 날을 지새웠다는 가족들의 얘기였다.

<생보자 절반 넘어>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2만5천여 명의 아이누 인은 물론이고 본토에 스며들어 남모르게 살아가는 위장 일본인 아이누의 생활실태는 이처럼 비참하다.
아이들 때는 학교 교실에서『아이누, 아이누』 라고 놀림받다 결혼해야 할 성년에는「냄새나고 더러운」배우자는 맞을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이질적 태도에 가슴을 애태우는 게 아이누가족 공통의 아픔이다.
홋카이도 청이 이들의 생활실태를 알기 위해 지난 86년 시행한「우타리 생활실태조사」는 이들의「차별 받는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의 직업분포는 42·3%가 농업·어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전체 인구의 절반이 생활보호대상인 극빈자며 중소기업을 경영한다고 답한 사람도 영세점포가 대부분이었다.
고교진학률은 일본인의 경우 94·3%임에 비해 아이누는 78·4%, 대학진학률도 8·8%에 불과했다.
이들 중 자신이나 가족이 차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사람이 71·6%, 또 61·2%가 지금도 계속 차별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한편 89년 12월 동경도 기획심의 실이 조사한 동경거주 아이누실태는 더욱 비참하다. 9O%이상이 홋카이도 출신인 이들 상경아이누는 상경이유에 대해 절반이상이「홋카이도는 생활하기 힘들어서」(54·9%)라고 밝혔고「차별 받고 싶지 않아」(32·9%),「인간관계가 어려워」(19·5)%등 대부분이 경제적 이유와 차별 때문에 무작정 상경했다고 밝혔다.
아이누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박해는 명치2년(1869) 일본인이 「홋카이도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밀려오면서 시작됐다.
일본정부는 개척 사를 두고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한다는 구실로 둔전병 l백98가구를 이곳에 입식 하면서 아이누의 주거지를 잠식했고 1877년「토지조사사업」을 이곳에서 처음 실시, 이들의 생활터전(코탄)을 관유 지로 빼앗았다. 1899년 제정된 구토인 보호법은 수렵어로민족인 이들 아이누를 농업 노동자 화하기 위한 의도로 제정되었으며 농사짓기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한 가구에 1만5천 평씩 급여했다.
이 농업 화 정책은 아이누의 생활기반을 서서히 파괴해 갔다.
급여 지의 대부분이 농사에 부적당한 황무지인데다「구토인 법」에 15년간 개간하지 않으면 몰수한다는 규정이 있어 현재 남아 있는 급여지(아이누사유지)는 당초의 15%인 1천3백ha에 지나지 않는다.

<식량공급원 봉쇄>
76년부터 이들의 주식인 사슴사냥을 금했고 83년엔 연어 잡 이를 법으로 금해 식량공급원을 원천 봉쇄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아이누에겐 국가 관념도 없었고, 조상과 가누이(신)의 은총으로 사냥할 수 있는 터전을 가진 것으로 족했으나 이때부터 외래 문명인(화인)이 강요한 일본말과 일본풍습을 억지로 배워야 했다. 이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누는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 가야 했고 외래 인에 묻혀 온 전염병으로 원인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홋카이도 동남부 히타카 지역은 아이누 최대의 밀집지역. 지금도 아이누인구의 42·8%인 1만3백90여 명이 거주하는 이곳은 비교적 온난한 기후에 수량이 풍부한 호로베쓰 강이 있어 아이누에게는 최적 지.
그러나 이 땅에 왕실 직속의 말 목장이 대규모로 조성된 19세기 말 이후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쫓겨나 유랑인의 신세가 돼야만 했다.
오가와 류기치(57·현 홋카이도 우타리 협회 이사)의 호적 속에는 이들 아이누의 기구한 역사가 그대로 각인 돼 있다.
태평양에 면한 항구도시 우라카와가 본적인 오가와 씨의 외조부는 이타구고레이. 우리나라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난 l894년 이곳 자연부락(코탄)에서 출생한 큰외삼촌의 이름은 슈산, 어머니는 나쓰코.
그에겐 이처럼 외가 쪽의 호적은 있으나 친가의 호적은 없다.
그의 성 오가와는 어머니의 성으로 호적에도 아버지 난은 공백이다.
1935년 8월 생인 오가와 씨의 아버지는 강제 연행된 조선인인 것이다.
동네어른들이 전하는 바로는 오가와 씨가 세 살 때인 38년 아버지 이씨(전남 광주 출신)는 그를 찾아온 이복형에 이끌려 조선 땅으로 떠났고 그 뒤 소식이 없다
l916년께 부 터 모집이나 관 알선, 강제징집 등으로 홋카이도에 끌려온 한국인 징용 자는 해방 전까지 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탄광에서 일했으나 발전소 댐 공사·도로공사 등 홋카이도가 개발한 토목공사에도 상당수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산악지대를 뚫는 난공사에 견디지 못한 나머지 적지 않은 수가 탈주했고 연민의 정을 느낀 아이누 인들이 이들 조선인 도망자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개중에는 딸까지 주어 코탄에 숨어살게 한 아이누도 있었다.
오가와 씨의 외조부 이타구고레이도 그중 한사람이었고 어머니 나쓰코(1944년 병사)와 아버지 이씨의 기구한 만남도 이렇게 이루어졌다.

<징용조선인 부친>
오가와 씨는 자신이 조선인을 아버지로, 어머니는 아이누인 인 조선-아이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10년 전까지 이를 숨겼다고 한다.
「털이 많은 아이누는 사람이 아니라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이라고 학교 교실에서까지 공공연하게 차별되어 왔던 터에,「조센진」이라는 2중의 멍에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오가와 씨는 자랑스럽게 이를 알리고 다닌다. 다섯 살 밑의 부인 사나에 씨와 함께 우타리 협회 일을 하면서「보다 떳떳하게 아이누로서 살아가는 게 아이누 독립의 첫 걸음」이라는 자각이 생기면서부터다. 사나에 씨는 남편에게 조신인의 항일정신을 아이누도 배워야 한다면서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고 치켜세워 큰 힘이 됐다는 얘기다.
오가와 씨는 87년 9월 노무라기이치우타리협회 이사장과 함께 아이누 족 대표로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소위원회(원주민작업부회)에 참석, 아이누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작업에 앞장서 국제무대에 당당치 서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두 차례나 우리나라를 방문, 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감격을 건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아이누에게 이는 예외적 케이스에 속한다. 삿포로 시 서쪽(백석구)에 자리잡은 아이누생활관. 비좁은 상담소엔 매일처럼 가난에 찌든 모습의 아이누들이 생활대책을 마련해 달라거나 일본인에게 진 빚을 못 갚아 땅과 집을 빼앗기게 됐다고 호소하기 위해 줄을 선다.
일본인 자신은 아이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과연 아이누를 차별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이에 대한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최근에 나왔다.
동북대 하다케나카 하루미(사학과)씨가 지난여름 동경과 홋카이도 거주민 각 8백 명을 대상으로 한 앙케트 조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아이누에 대한차별유무에 대해「있다」와「조금 있다」를 합쳐 동경이 40·2%, 홋카이도가 60·1%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없다고 부정한 사람은 35· 2%(동경), 26·8%(홋카이도). 일본인 스스로 어떤 형대로든 아이누를 차별하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삿포로=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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