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화|김용일<서울대병원 제2진료부원장·병리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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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우리나라 국민처럼 약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사람들도 없다.
대학병원·개인의원에서 환자에게 구두지시나 섭생법을 알려주기만 하고 약을 처방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환자 수가 의외로 많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건강을 이른바 보약이라는 각종 양약·한약에 맡기고 있는 것과 상통된다.
그러나 우리가 편식하지 않는 한 일상음식에는 인체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양소가 충분히 함유돼 있어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불필요한 것은 모두 배설되게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먹은 약에 의한 부작용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약3천 종 이상의 신약이 개발, 시판되고 있다.
하나의 신약이 개발되기까지는 최소한 5년 이상 동물실험을 통해 약물의 효능이나 안전성 검사는 물론 전문의사의 책임아래 임상시험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에 의해 처방되는 약품의 10% 정도는 체질 또는 질병의 특성 내지 약품의 대사기전에 따라 크고 작은 부작용을 유발시킨다.
이런 부작용은 전신의 각 장기에 나타날 수 있지만 약물의 대부분이 간에서 대사 되기 때문에 간에 대한 부작용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약물에 의한 간염을 분석해 보더라도 항생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약제에 원인이 있으며 한약도 그 예외는 아니다.
이들 약제는 체질에 따른 과민성 반응, 세포독성 작용 등 두 가지 기전에 의해 간세포를 대량으로 죽이고 있다.
아무리 열이 높고 감기증세가 있다 하더라도 미국인들은 의사의 지시 없이 아스피린 이외엔 약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꼭 필요할 때를 위해 약 복용을 삼가는 것은 물론 불필요한 약물 투여로 인한 약화(약화)를 줄이기 위해서도 무엇인가 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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