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광주 희생자들은 입다 물고 있는데 … 도대체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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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는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영화 ‘밀양’의 이창동 감독이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발표 당시 읽고 ‘광주 이야기’라 간파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이 그러했다.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정치적 알레고리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광주항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아직 용서할 상황이 아닌데, 가해자 집단이 먼저 화해를 내세우는 역설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비판의식이 숨어 있는 것을 어찌 알아냈을까(최근 이청준은 한 인터뷰에서 이를 확인해 주었다). 놀라운 독해력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작품의 창작동기에 얽매어 『벌레 이야기』를 읽을 필요는 없다. 해석의 지평은 다채롭고 다양한 법이다. 더욱이 별도의 단행본으로 나온 『밀양-벌레 이야기』(열림원)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해 썼으며, “섭리자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를 묻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벌레 이야기』 가 주는 충격은 여기에서 비롯한다.내 아이를 죽인 범인의 “눈깔을 후벼 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정리다.

그러나 신의 지극한 사랑의 세계에 귀의해 가해자를 용서하려 마음을 먹었다.그런데, 놀라워라! 그 가해자가 이미 신의 용서를 받은데다 피해자 가족의 “어떤 저주나 복수도 용서할 각오”가 되어 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늪에 빠질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하고 외려 용서받게 만든 절대자의 사랑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섭리나 교리의 이름으로 이를 만회할 수 없다. 어찌 이 일이 죽은 자와 그 가족들을 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기적 같은 사랑의 열매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것은 한 인간을 한낱 벌레로 전락시키는 절대자의 횡포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리에서 독신(瀆神)의 자리로 옮긴 알암이 엄마가 느낀 절망은, 작가의 표현대로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벌레 이야기』를 광주 이야기로 읽은 이창동의 해석은 의미 없는 것일까. 이 고민의 실마리를 풀어준 책이 강풀의 장편만화 『26년』 (강도영 지음, 문학세계사, 전 3권)이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광주의 민중들은 항쟁했다.그 대가는 처절한 죽음이었다.그러나 일상의 ‘산도(酸度)’는 강하다. 누구도 더 이상 광주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광주로 상징되는 진보적 가치가 ‘부식’당하고 만 것이다. 무릇 모든 것의 역사화나 성역화는 그 사실의 박제화를 불러오는 법이다.거기에다 용서와 화해, 보상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은 아픈 과거를 더 이상 회상치 못하게 하는 억압의 근거가 되곤 한다.

강풀은 이 같은 합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도대체 누가 용서를 했는가? 광주 희생자와 그 자녀들이 용서했는가. 타락한 권력에 동원돼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한 사병들이 용서했는가. 오로지 정치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짬짜미로 화해를 들먹거린 것뿐이지 않은가. 더 이상 벌레 같은 존재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이청준은 자살을 택하도록 했다.강풀은? 테러다.

함부로 용서와 화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할 권리마저 박탈당한다면, 설혹 절대자라 하더라도 그를 저주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불손하고 불온하다 여기는가. 나는 소설『벌레 이야기』 가 ’밀양’과는 다른 영화로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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