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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서 보는 힘의 국제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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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즘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명확히 보여 준다. 14일 민주적 총선으로 집권한 하마스 정부가 무너졌다. 반대 정파인 파타당 지도자이자 자치정부 수반인 마무드 압바스는 내각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전격 선언했다. 바로 다음날 새 임시 내각이 발표되고 파타당은 정권을 장악했다. ‘위로부터의 쿠데타’나 다름없다. 팔레스타인의 양대 세력인 파타와 하마스가 사실상 내전을 벌이면서 팔레스타인은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와 파타당의 세력권인 요르단강 서안으로 분리되고 있다. 독립국가의 맛을 보지도 못하고 분열하는 상황이다.

 선거에서 이긴 하마스가 주도했던 자치 의회와 정부의 이 같은 붕괴는 지난해 초 이미 예견됐다. 이스라엘은 자치정부에 줘야 할 매월 5500만 달러의 세수 이체를 동결했다. 이어 미국 주도 아래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도 지원을 중단했다. 하마스 정권은 재정 파탄으로 결국 고사하고 말았다. 월급을 받지 못한 자치정부 공무원들과 파타당에 충성을 다 하는 보안대원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으로 발전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라고 주장한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한 저항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7년과 73년 두 차례의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계속 고수해 온 이스라엘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내에의 저항도 ‘테러’로 몰아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하마스 정부의 붕괴를 야기하고 방관한 것은 정치적으로 더 큰 파장을 부를 수 있다. 이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 직후 추진해 온 ‘대(大)중동 민주화구상’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의 명분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것에서 찾기 위해 한동안 이 구상을 대중동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 큰 틀의 외교정책마저 과감하게 바꾼 것이다.
 이런 팔레스타인 상황에 국제사회도 침묵하고 있다. 미국이 압바스 수반을 공식 지지하고, 하마스 정부가 무너지자마자 원조 재개를 선언하자 EU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이에 따르고 있다.

 ‘형제국가’ 아랍·중동권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대치 중인 이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랍권 정부는 팔레스타인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 심지어 이집트는 하마스 정부 붕괴와 동시에 대사관을 가자지구에서 파타당의 거점인 요르단강 서안으로 옮겼다. 아랍 형제애도, 정의도 미국을 막지 못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개시 직전, “사담 후세인 정부를 제거한 뒤 중동평화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임기 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테러세력’ 하마스 정부의 등장으로 팔레스타인 평화 정착이 늦어졌다고 주장한다. 결국 미국과 가치관이 다른 정권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중동 평화가 가까운 시일 안에 달성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중동 지역에서의 파워 게임은 우리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당장 유가도 문제지만, 강대국 사이에서 북한 문제로 고심하는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명분과 정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따르거나 주장해 봐야 국제사회의 차가운 현실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이는 중동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마찬가지다.

서정민 카이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