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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예비후보 62명, 잠룡인가 잡룡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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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潛龍). 아직 하늘로 오르지 않고 물속에 숨어 있는 용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정치권에선 자의든 타의든 잠룡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잠룡(潛龍)이 아니라 잡룡(雜龍)’라는 우스갯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글자 그대로 범여권 대선 주자 ‘춘추전국 시대’다. 대선 출정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 대선 후보로 얼굴을 내비칠 뜻을 품은 사람만 2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조인스 풍향계 및 각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지지율은 모두 합쳐도 20%에 채 미치지 못한다. 범여권 주자들 중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정도만 주요 여론조사 대상자에 포함된다. 열린우리당 통합추진위원인 박병석 의원은 “여권에 대선 후보가 너무 많다. 대선 출마를 포기한 김근태 전 의장처럼 제2, 제3의 대선 포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대선주자 난립=현재 정치권 분위기는 비(非)한나라당 후보면 모두 범여권으로 묶는 분위기다. 범여권 대선 주자 중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는 손학규(60) 전 지사는 “여러분과 함께 대한민국을 선진과 평화의 길로 이끌겠다”며 3월 한나라당을 탈탕한 후 일찌감치 출정식을 가졌다. 최근 단독으로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정동영(54) 전 의장은 “대통합의 마중물(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위에서 처음 붓는 물)이 되겠다”며 출마를 선언했다.

참여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사들도 출마 선언 대열에 합류했다. 19일 이해찬(55) 전 총리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깊이 성찰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고 밝히며 출마를 공식화했고 한명숙(62) 전 총리도 “서민과 통하는 대통령, 국민과 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시민(48) 열린우리당 의원은 자신의 지지모임인 ‘참여시민광장’ 오픈 축하 동영상 메시지에서 “여러분과 함께 상의해 가면서 적절한 때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시기 조율만 남겨놓았다. 김혁규(68) 열린우리당 의원은 “당 지도부에서 대통합 과정을 지켜본 뒤 출마선언을 해 달라는 요구가 있어 연기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출판기념회로 대선 출정식을 대신하는 후보도 눈에 띈다. 김병준(53) 대통령 정책특보는 최근 출판기념회에서 대선 출마를 묻는 질문에 “책을 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답했다. 신기남(55) 의원도 출판기념회에서 “민주주의, 정치개혁에 이어 복지문화국가 건설이라는 세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앞장서 나가겠다”며 대선 주자임을 자임했다.

추미애(49) 전 민주당 의원은 “대선 후보는 분당과 국정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이런 것을 갖췄다”고 말했고 김원웅(63) 열린우리당 의원은 “범여권의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 경선에 나서겠다”고 말해 대선 후보로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전직 장관들의 출사표도 줄을 이었다. “개천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두관(48) 전 행자부 장관, 강운태(59) 전 내무부 장관, 김영환(52) 전 과학기술부 장관 등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노회찬(51)의원, 심상정(48)의원, 권영길(66)의원이 이미 예비 후보 등록을 마쳤다. 이밖에도 장영달(59)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문국현(58) 유한킴벌리 사장, 민생정치모임의 천정배(53) 의원, 조순형(72) 민주당 의원의 출마설이 떠돈다.

◇대선 출마엔 어떤 뜻이=전직 총리 및 장관, 당의장, 국회의원 등 현 참여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범여권 후보들은 각자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대한민국의 앞날을 밝힐 각오를 다지고 있다. 아직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6개월 가량 남았기 때문에 어느 누가 ‘푸른 지붕’으로 입성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1%도 채 미치지 못하는 데도 대선 정국에 과감히 뛰어드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대선 후보 경력’ ‘대선 이후 총선 대비’ ‘주변 환경의 문제점 해결로 인한 자기 홍보’ 등의 이유를 들었다. “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적 있소”라는 타이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거전략컨설팅 ‘이윈컴’의 이성진 팀장은 “우후죽순으로 후보가 나오는 것은 대권 도전이 아니라 차기 총선을 위한 포석의 의미가 더 크다. 이름을 알리면서 동시에 당내 입지를 탄탄히 하다보면 시·도 광역단체장 자리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선거 컨설턴트는 “각자 이름을 알린 후 소속돼 있는 당 또는 단체의 후보를 지원하며 ‘밀어주기’ 들러리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제사보단 잿밥에 관심을 둔 경우”라고 말했다.

세종대 이남영(정치학과) 교수는 “자신의 주변 환경의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기업가는 기업의 홍보를, 지역 단체의 대표는 지역 문제를 이슈화해 기득권을 얻는 식의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본격적인 대통령 후보 등록 시점이 오면 이 가운데 60~70%는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부는 ‘노 대통령 당선에 의한 학습효과’도 언급했다. 대선 1년 전 지지율이 한자릿수에 불과했던 당시 노무현 후보가 대권을 잡은 ‘반전 드라마’를 보고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지난번 같은 반전 드라마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더 많다.

25일 현재 중앙선관위에 등록한 예비후보는 총 62명이다. 정당별로는 한나라당 4명, 열린우리당 6명, 민주당 4명, 민주노동당 3명, 시민당 1명, 신미래당 1명, 무소속 43명이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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