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부산사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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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특정후보 지원방안을 논의한 사실은 참으로 기막힌 사건이다. 누구보다 앞장서 중립을 독려하고 부하 공무원들을 단속해야 할 고위공직자들이 노골적인 편향과 관권개입 의사를 보였다는 점에서 기가 막히고,사석의 이런 모임을 비밀히 녹음·폭로하는 선거운동의 고도의 기술(?)도 기가 막히는 일이다.
문제의 회동은 이젠 민간인 신분이 된 전 법무장관의 초대로 이루어진 비록 사석의 성격이지만 모인 면면이나 논의내용을 보면 일종의 비공식 「대책회의」라고도 할만하다. 연기군사건의 기억이 생생한 터에 다시 이런 모임이 열렸다는 자체도 문제요,이들이 민자당후보 지원을 위해 지역감정 자극·언론인 매수·민간단체 동원 등 온갖 고약한 꾀를 주고 받았으니 그에 따른 행정·사법상 조치는 불가피하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보고 정부의 중립은 결국 총리와 몇몇 장관만의 중립뿐인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현 내각의 등장이후 그토록 정부가 중립을 강조해왔는데도 이번 사건은 말단공무원도 아닌 직할시장·지방경찰청장 등 고위공직자들의 중립 부재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아닌 다른 지역,다른 공무원들이라고 정도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일이 없겠는가. 우리는 물론 30년 관권개입의 타성이 쉽게 고쳐질 수 없고,특히 김영삼후보의 본고장인 부산에 친김영삼정서가 짙게 깔려있을 것도 짐작한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나마 조심스레 평가받던 정부의 중립의지를 뒤흔들었을뿐 아니라 설사 중립정부가 아닌 보통정부에서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문제의 기관장들을 신속하게 해임·직위해제 등 조치를 취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보며,나아가 이들이 공직을 이용해 선거개입을 했는지 여부도 철저히 가려야 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제 하루밖에 안남은 선거운동기간이지만 전공무원들에게 선거중립의 경각심을 다시 한번 불러 일으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번 일에서 우리가 느끼는 또 한가지 사실은 우리 선거운동이 장차 어디까지,어떤 형태로까지 가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번 경우 비밀리에 녹음·공개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권개입차단에 도움이 됐지만 선거운동을 마치 첩보작전처럼 첨단장비를 동원하고 고도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해도 괜찮은가 하는 일말의 걱정이 드는 것이다. 공직자도 사생활은 있는 법이고 사인으로서 지지하는 후보가 없으란 법이 없는데 일과아닌 시간의 사석에서조차 고성능녹음기를 걱정해야 한다면 이것도 보통일은 아닐 것이다. 막판의 선거과열이 이런 첩보전 같은 상호 감시·적발을 가져왔다고 보지만 이런 선거판을 보는 심경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부산사건은 투표일이 임박한 만큼 빨리 관련사실을 밝혀내고 행정·사법상의 추가조치가 필요할 경우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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