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조선시대 양반과 기생(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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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7면

전편에 이어 기생 얘기의 계속이다. 진장(鎭將) 노상추(盧尙樞)는 과연 수청기생 석벽(惜壁)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데려가는 데 성공했을까? 1790년(정조 14) 3월, 부임지 갑산을 떠날 때 노상추는 그들을 대동했다. 노상추는 어떻게 관기(官妓)를 내놓지 않으려는 관과 타협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노상추일기』에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의 친구 이익해와 수청기 희숙의 사연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익해가 희숙을 데리고 가려 했던 것은 소생으로 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다. 그가 본래 종실(宗室)이라 대대로 면천(免賤 천역을 면함)을 할 수 있어서 자식들을 데려가도 관에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직 어려 어미가 없으면 데려갈 수 없어서 본진(本鎭)에 요청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본진에서 허락하지 않아 희숙이 가지 못하게 되니 자식들도 못 가게 되었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노상추일기』1788년 8월 2일)

이익해는 노상추보다 먼저 산수 갑산에 파견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수청기 희숙과 두 남매를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끝내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익해는 며칠 후 희숙과 젖먹이 아들은 두고, 딸만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이익해는 종실로서 상당한 특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청기를 관에서 빼내는 것이 어려웠다.

이렇게 볼 때, 노상추는 아마도 석벽을 데려오는 데 상당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특별한 청탁을 했거나, 아니면 석벽 또래의 노비를 대신 관에 납부해야 했으리라. 이 모든 과정은 꽤 복잡하고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나 노상추처럼 수청기와 그 자식에 대해 강렬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상추는 1793년 삭주 부사로 발령받아 가는 중에 평안도 박천을 들른다. 그곳에서 노상추는 천고(賤姑 천인 신분 고모)를 만난다. 할아버지가 박천에서 근무할 때 수청기 춘대선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할아버지가 왜 그들을 두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수청기였던 춘대선은 계속 기생 노릇을 했고 당시 82세인데, 지난 59년간의 일을 다 설명할 정도로 총기가 좋았다.

그 딸인 천고는 기생으로 있다가 지금은 탁선달의 첩이 되었다. 또 천고의 딸은 역시 기생으로 이름이 계월이다. 기생은 기생을 낳고, 그 기생은 또 기생을 낳았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의 딸들이 기생이 되었다.

노상추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천고와 계월을 면천시키고 싶어 했다. 평안감사는 전례가 없는 일이나 노상추가 부탁하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준다고 생색을 냈다. 노상추는 왜 천고를 면천시키고 싶어했을까? 기생은 역시 벗어나고 싶은 신분이었던 것일까?

물론 춘대선과 석벽의 인생은 달랐다. 춘대선은 평생 기생 노릇을 해야 했고, 그 자식들은 천인 신분으로 살았다. 석벽은 노상추의 첩으로서 자식들이 서얼이긴 했지만 천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석벽은 노상추의 세 번째 부인이 죽은 후에는 노상추가 다시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꽤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기생들은 춘대선과 같은 삶을 원했을까, 아니면 석벽처럼 첩이 되고자 했을까. 특히 황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