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기생 얘기의 계속이다. 진장(鎭將) 노상추(盧尙樞)는 과연 수청기생 석벽(惜壁)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데려가는 데 성공했을까? 1790년(정조 14) 3월, 부임지 갑산을 떠날 때 노상추는 그들을 대동했다. 노상추는 어떻게 관기(官妓)를 내놓지 않으려는 관과 타협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노상추일기』에는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의 친구 이익해와 수청기 희숙의 사연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익해가 희숙을 데리고 가려 했던 것은 소생으로 남매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다. 그가 본래 종실(宗室)이라 대대로 면천(免賤
이익해는 노상추보다 먼저 산수 갑산에 파견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수청기 희숙과 두 남매를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끝내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익해는 며칠 후 희숙과 젖먹이 아들은 두고, 딸만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이익해는 종실로서 상당한 특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청기를 관에서 빼내는 것이 어려웠다.
이렇게 볼 때, 노상추는 아마도 석벽을 데려오는 데 상당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특별한 청탁을 했거나, 아니면 석벽 또래의 노비를 대신 관에 납부해야 했으리라. 이 모든 과정은 꽤 복잡하고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나 노상추처럼 수청기와 그 자식에 대해 강렬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상추는 1793년 삭주 부사로 발령받아 가는 중에 평안도 박천을 들른다. 그곳에서 노상추는 천고(賤姑
그 딸인 천고는 기생으로 있다가 지금은 탁선달의 첩이 되었다. 또 천고의 딸은 역시 기생으로 이름이 계월이다. 기생은 기생을 낳고, 그 기생은 또 기생을 낳았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의 딸들이 기생이 되었다.
노상추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천고와 계월을 면천시키고 싶어 했다. 평안감사는 전례가 없는 일이나 노상추가 부탁하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준다고 생색을 냈다. 노상추는 왜 천고를 면천시키고 싶어했을까? 기생은 역시 벗어나고 싶은 신분이었던 것일까?
물론 춘대선과 석벽의 인생은 달랐다. 춘대선은 평생 기생 노릇을 해야 했고, 그 자식들은 천인 신분으로 살았다. 석벽은 노상추의 첩으로서 자식들이 서얼이긴 했지만 천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석벽은 노상추의 세 번째 부인이 죽은 후에는 노상추가 다시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꽤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기생들은 춘대선과 같은 삶을 원했을까, 아니면 석벽처럼 첩이 되고자 했을까. 특히 황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