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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호 13면

아는 만큼 보인단다. 경복궁인가, 창덕궁인가에 갔을 때 초로(初老)의 가이드는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너희가 이걸 알아? 이걸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야. 가이드의 역사적 지식은 해박했고, 그의 설명을 듣고 나니 과연 기왓장 한 장도 단순한 기왓장 한 장이 아닌, 어떤 숭고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데, 딱 그것뿐이었다. 내 느낌은 간데없고, 타인의 감흥만 남은 듯한, 이 ‘오래된’ 공감각들.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디파티드’를 본 뒤 내 감상의 발자취들이 꼭 그 꼴이 되어버렸다. 사방에 ‘영화 좀 본다’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내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를 어떤 ‘운명’에 관한 것으로 보았다. 주인공들은 모두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그 환경을 이겨내고자 자신이 속한 조직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해 나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태생(환경)’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보스의 ‘눈’에 띄는 것. ‘환경’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단 이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직의 보스 또한 마찬가지다. 천대받는 아일랜드 출신 보스 코스텔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환경’을, 자신의 힘으로 뒤바꿀 수 있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의지’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신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자의 의지.

이 영화가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어버렸다는 데 있었다(이렇게 모두 죽어버리는 영화를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코스티건이건, 코스텔로이건, 설리반이건 모두 자신의 의지가 실현되었다고(근접했다고) 믿는 순간,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만다. 선이고 악이고, 온데간데없이 죽어버리고, 죽은 자의 창밖으로 검은 쥐 한 마리와, 거대한 성당의 돔만 남을 뿐이다. 해서 나는 당연히 ‘아아, 그렇지, 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지, 그게 연약한 인간들의 운명이지, 아무리 몸부림쳐봤자 별 수 없는 우리네 삶이지’ 하는 생각을 했다. 또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다가왔다.

한데, 이 영화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니 내 감상이 그리 ‘좋은’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멍청한 놈아, 마지막에 보였던 것은 성당의 돔이 아니고, 주 의회 의사당 건물이다, 그리고, 이건 ‘무간도’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야, ‘무간도’도 안 보고 이걸 봤단 말이야, 이건 정치적인 영화야.’ 이 사람 저 사람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본 영화의 줄거리마저도 이 사람 저 사람이 본 줄거리로 변해버리게 되었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이야기. 나는 좀 주눅이 들었다. 주눅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계속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게 되는 것일까? 아는 만큼 동일해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냥 이 영화를 ‘부처님 손바닥’으로 생각했는데, 모르는 만큼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인데. 나는 잔뜩 주눅 든 채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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