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은행지점장|예금실적에 울고 웃는 "행원의 꽃"|「꺾기」도 재주껏 잘해야 "유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은행지점장들은 요즘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사건 때문에 괜히 고객들이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 것 같고 가족이나 친구들 대하기도 그전 같지 않다.
은행지점장은 은행 근무경력 20∼25년만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르는 자리다. 상법상 모든 은행영업을 책임지고 맡아 하는 지배인의 위치에 있다. 기사가 딸린 승용차도 나오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다. 시골에 가면 유지로 대접받기도 해「행원의 꽃」또는「작은 은행장」으로 불린다.
지점장은 그러나 고달프기 짝이 없다.
지점장은 두엇보다 예금실적에 따라 울고 웃는다. 실세금리가 급격히 떨어지고 은행에 자금이 남아도는 저금리상황에서 이제 은행도 예금실적만 볼게 아니라 수익을 따져야 한다는 바람이 불고 있지만 아직도 지점장의 능력을 재는 주된 잣대는 예금유치다. 따라서 지점마다 예금실적을 높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며 때로는 경쟁이 지나쳐 물의를 빚기도 한다.

<돈 안 가리고 유치>
실적에 몰리다 보니 이돈 저돈 가릴 처지가 아니다. 급한 김에 사채자금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은행금리를 훨씬 웃도는 높은 이자를 챙겨 주어야 하니 이를 부담하기 위해 대출 커미션을 받는 부조리가 생겨난다.
은행감독원에서 꺾기를 단속하는 특별검사가 나오고 본점에서 꺾기를 자제하라는 공문이 내려와도 눈치껏 꺾기를 잘해야 유능한 지점장으로 은행 안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은행은 차장이 연간 40억 원의 예금을 유지하면 지점장으로 승진시키고 지점장으로 있을 때 예금이 4%이상 줄어들면 자리가 위협 당한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끌어 들여야 한다. 관내의 거래처를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식사도 대접하고 큰 고객에게는 골프모임도 주선해 주어야 한다. 주변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고 애로사항도 파악해 두어야 한다. 일산신도시의 토지보상금을 사로 많이 유치하기 위해 은행들이 경쟁할 때 한 지점장은 아예 집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직원 몇 명과 함께 밭일 등 농사까지 거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본점에서 자금이 모자라니 대출을 억제하라는 지시 한마디가 떨어지면 평소 알고 지내던 거래처와도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당좌예금 잔고보다 많이 대출해 가는 당좌 대 월을 줄이느라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한다.
실적이 나쁜 지점을 맡으면 예금실적을 늘리고 수익을 개선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러나 영업실적이 좋은 지점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밑에서 현금을 만지고 있어 언제 금융사고가 터질 지 모르기 때문에 직원들의 표정이나 행동 하나 하나에도 평소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요즘같이 중소기업이 걸핏하면 쓰러지는 상황에선 대출 받은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는지도 잘 지켜보아야 한다. 예금을 많이 끌어들이는 것 못지 않게 부실 대출을 가급적 줄여 만약의 사고를 막아야 한다. 또 부동산 시세가 약한 근래 상황에서는 대출 받은 개인이나 기업들이 맡겨 놓은 부동산 담보불의 가격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자기 집 값보다 담보물 값 걱정을 더해야 하는 판이다.
힘겨운 경쟁을 뚫고 얻어낸「행원의 꽃」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그렇지 않아도 건강에 빨간 신호등이 켜질 무렵인데 이같이 위 아래로 쌓이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니 건강관리에도 유의해야 한다.
시중은행의 경우 서울명동·서소문·남대문·소공동·종로·여의도지점 등 이 특 A급으로 꼽힌다. 이들 지점의 예금 고는 1천억 원대를 넘으며, 다음 인사 때 본점의 알짜배기 부장을 거쳐 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크다. 지점장이라면 한번쯤 임원승전을 꿈꿀텐데, 경쟁률도 1백대1이 넘을 정도로 치열하다.

<승진 경쟁도 치열>
이번에 자살한 이희도 상업은행 명동지점장은 특 A급 점포로 통하는 서소문·명동지점장을 거치면서 예금 1위를 기록, 상당한 수완을 인정받아 오던 터였다. 그러나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느 지점장과 같이 지점 주변의 고객을 상대로 열심히 발로 뛰어 예금을 유치한 게 아니라 변칙적으로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발행하고 유통시킨 것으로 드러나 문제가 됐다.
이 지점장은 구로·서소문·명동지점을 거치면서 1천억 원이 넘는 거액의 수신증가를 기록했지만 정상적인 예금유치가 아니라 그가 떠나면 불과 몇 달이 안돼 그 지점의 예금이 빠져나가 이 지점장이 옮긴 지점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상업은행측은 이 지점장이 지점을 옮길 때마다 1천억 원이 넘는 수신증가를 보였는데도 자랑스럽게 저축의 날에 공적 서를 올려 훈장을 받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도 다른 많은 지점장들은 열심히 현장을 뛴다.
64년부터 매년 저축의 날이면 많은 지점장들이 예금을 유치한 노고를 인정받아 상을 받는다. 지난1월 주택은행장에 처음으로 내부 승진한 김재기 주택은행장은 지점장시절 뛰어난 예금유치능력을 보였으며 76년 수표 동 지점장으로 있을 당시 저축의 날에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올해 어린이를 상대로 주택예금을 들게 하는 차세대주택종합통장을 만들어 히트한 것도 오랜 점포 장 생활로부터 나온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주택은행장과 함께 박기진 제일은행장, 윤순정 한일은행장, 김준협 신탁은행장 등 이 지점장시절 빼어난 영업수완을 발휘한「영업 통」으로 알려져 있다. 김 신탁은행장은 스스로「장사꾼」으로 불리길 원할 정도며 임원이 될 때까지 본점의 부서장은 지내지 않았고 줄곧 일선 지점장으로만 돌아다녔다. 은행장이 된 지금도 예금유치를 위해 직접 뛰어다닐 정도로 유명하다.
박 제일은행장도 지점장시절에 이름을 날렸으며 그 감각으로 89년 수신담당 상무 때「55일 작전」을 실행, 5백억 원의 예금을 유치한 기록의 보유자다. 윤 한일은행장은 고졸출신으로 51년부터 42년 동안 은행 인으로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데, 81년7월 특급지점인 본점 영업부장 때는 1년 반만에 1천5백억 원의 예금을 유치하는 진 기록을 세웠다.
지난 10월27일 29회 저축의 날에 가장 큰상인 국민훈장동백장을 방은 윤인학 주택은행수신부장(51)도 전형적인 금융세일즈맨이다. 그는 85년 9월 대전지점장시절 주택은행지점이 없는 신탄진·부여·논산에까지 원정 나가 부근 직장의 종업원들을 상대로 월 3만원, 또는 5만원씩 예금하는 재형저축으로만 석 달 만에 3억7천만원의 예금기록을 세웠다. 그는 이 지점에 1년 동안 근무하면서 2백60억 원이던 수신을 5백억 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기업체를 방문, 근로자를 상대로 재형저축·근로자 장기저축 등 적립 식 예금을 주로 들게 하는「개미저축」의 대가로 불린다. 그는 자신이 앞장서고 지점의 모든 직원들에게 「맨투맨」으로 고객들을 상대해 예금을 들게 한다. 주택은행이 그동안 28번 저축캠페인을 했는데 25번이나 은행장표창을 받아 상 받는 타율이 9할 대에 육박할 정도다.
이날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은 권석곤 제일은행 여의도광장 지점장(55)도 63년에 입 행한 이후 줄곧 일선에서 근무한 야전출신 점포 장. 11차례나 은행장 상을 받았으며 종로지점장 시절 저축홍보 가두캠페인을 열성적으로 했다. 석류장 수상자인 한기영 외환은행 충무로 지점장(52)은 경주지점장시절「서라벌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앞장서서 저축을 늘렸고 광화문 지점장 때는「광화문 신바람 운동」을 전개해 직원들이 신이 나 근무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국민포장을 받은 손영식 대동은행 영업부장(49)은 한번 거래한 고객에겐 잊지 않고 끊임없이 예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은행이용의 편리함을 알려줘 다시 찾아오게 한다. 그는 행원들에게 거래고객에 대한 자료를 정리, 분석해 갖고 계속 연락관제를 유지토록 했으며, 하루 50개 거래처에 전화 걸기 운동을 하는 등 은행이 고객 곁으로 최대한 가깝게 가는 영업전략을 펴 성과를 거두었다.

<월급 2백50만원>
이준호 국민은행 평화지점장(48)은 답 십리 지점장 시절 지역주민을 위한 고객전용 응접실을 설치하는 등 창구의 레이아웃을 바꿔 고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지점장이 자기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대출한도는 은행마다 지점의 크기와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신용대출의 경우 3천만원, 담보대출의 경우 1억 원 선이다. 자살한 상업은행 이희도 지점장이 갖고 있었던 롯데쇼핑의 어음매입을 통한 대출과 같은 신탁자산의 운용은 은행마다 지점장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주고 있으나 역시 본점에 보고는 해야 한다.
5대 시중은행 지점장의 월 평균 급여는 2백50만원 선이다. 판공비는 월 급여수준인데 예금을 유치하러 다니며 써야 하는 식대 등 접대비와 수십 명씩 되는 직원들과의 회식 비·경조비 등을 따져 보면 남는 게 없다고 한다.
금융계는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횡령 유용사건이 그동안 은행이 취해 온 수신실적위주의 은행경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만큼 이들 지점장 관리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희도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사건이 많은 은행고객과 지점장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오늘도 대다수 많은 지점장들이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양재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