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선에 불과한 「꺾기」단속/홍승일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일정금액 이상을 「꺾는」 금융기관 직원은 『파면하라』는 이용만재무장관의 지시가 보도된 24일 오후 기자에게 초로의 한 중소기업인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쉰다섯의 김 사장」이라고만 신상을 밝힌 이 기업인은 그 보도가 나간 직후 순진하게 대출을 받으러 갔다 창피당했던 일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외형 2백억원정도의 자동차 부품업체를 경영하고 있으며 지난 20여년간 은행문턱을 드나들면서 이자 한번 제날짜 넘긴 일이 없을만큼 철저히 신용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몇년전부터는 매년 상공부 우량중소기업으로 지정될 정도로 경영이 건실한 모범 중소기업임을 자부하기도 했다. 김 시장은 24일 전례없이 강도높은 「꺾기」단속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평소 거래하던 은행지점에 달려가 바로 그 「꺾기」요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20억원 대출건을 성사시켜 달라고 졸랐다.
『파면까지 시킨다는데야…』하는 기대였지만 『역시…』하는 실망감만 안은채 너무 순진했던 자신의 「단견」에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 넘게 장사해온 분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현행금리로 누가 큰돈 들고 예금하러 옵니까. 꺽지 않으면 지점운영을 할 수 없는 사정 잘 아시잖아요. 꺾기 단속한다는 얘기가 어디 어제 오늘 얘긴가.』
지점 대출담당자의 짜증섞인 핀잔과 함께 20억원을 대출받으려면 10억원짜리 정기적금이나 5억원짜리 정기예금을 들어야 한다는 당초 요구사항만 되풀이 확인하고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은행감독원에 호소했더니 은행지점과 담당자 이름을 알려주면 조치하겠다고 했지만 끝끝내 은행이름조차 대지 못했다.
『장사를 때려치우려면 몰라도 거래은행을 당국에 고발하고 무사하게 돈꿀 수 있는 기업은 아마 우리나라에 한군데도 없을 것』이라면서 그는 씁쓸히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자신의 경험을 담담히 털어놓던 김 사장도,걸핏하면 꺾기를 규제하겠다고 공언해대는 당국이 꺾기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금리체계는 그냥 놔두고 꺾기행위만 무턱대고 규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대목에 가서는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대출액의 1백40%를 담보로 넣고도 절반을 정기적금으로 「꺾여야」하는 힘없는 중소기업의 처지를 김 사장은 한탄했다. 덧붙여 그는 『연내에 공금리를 내리면 아는 사람들의 예금을 몰고오라고 지점장이 더욱 들볶을텐데 그것도 큰 걱정』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