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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새없는 장난전화로 녹초/당직근무(공무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잘해야 “본전”자칫하면 “문책”/차례 잦아 외도 오해 부부싸움도/쥐꼬리 수당 아침먹고 나면 빈손
잘해봐야 본전.
당직근무는 공무원들에게 「혹」같은 존재다.
퇴근 이후의 「긴급상황」에 대비,잠 한숨 못자고 고생하지만 별로 근무했다는 표가 나지 않는데다가 만약 진짜로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처리여하에 따라 최악의 경우 옷까지 벗어야 할만큼 책임이 큰 근무이기 때문이다.
5공시절 정부 제1청사의 당직사령(국장급)이 「잘린」일화는 공무원들에게 「귀감」이 되고있다.
평온한 가운데 새벽녘이 되자 다음날 근무를 위해 당직실에서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쉬던 이 국장은 불시에 순시나온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발각돼 『자네 집에 가서 자지』란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이처럼 부담가고 귀찮은 당직근무는 마치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금세 차례가 돌아온다.
여성공무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당직자원이 줄어든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읍·면·동 등 일선 행정기관에서 두드러져 서울시내 동사무소의 경우 직원의 3분의 1 가량이 여성공무원이다.
서울 종로구 한 동사무소의 서기인 김모씨(29)는 『1주일에 한번꼴로 숙직을 하다 보니 집에서 오해를 받아 부부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며 씁쓸해했다.
이처럼 숙직부담이 커지자 내무부는 지난 6월11일 여성공무원에게도 당직을 실시토록 하라고 지시했으나 아직까지 여성공무원에게 숙직근무를 시킨 「비신사적인」행정기관은 단 한군데도 없다. 야간당직은 졸음과의 전쟁이다. 여름에는 모기에 시달리며,겨울엔 오들오들 떨며 잠을 참는다. 초현대식 건물에 걸맞은 중앙집중식 난방은 5시면 어김없이 꺼진다.
그러나 이같은 고통은 「전화공세」에 비하면 차라리 낫다.
보사부 모 사무관은 『쉴새없이 걸려오는 항의성 전화에 시달리다 보면 아예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라면을 끓여먹는데 유리조각이 나왔다. 국민건강의 파수꾼이 되기는 커녕 불량식품업체를 봐주는 것 아니냐. 당장 장관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등의 전화에도 일일이 해명을 해주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경찰과 소방서의 당직은 허위·장난전화에 시달린다.
서울 영등포경찰서 중앙파출소 길철수순경(32)은 『112신고에 따라 현장에 출동해보면 아무일도 없는 일이 허다하다』며 『허위신고 의심이 들어도 안나가볼 수 없어 밤새 이리저리 뛰다 보면 「불발」「이미 사해(사건해결에)」에 녹초가 된다』고 말했다. 이 파출소에 올들어 신고된 범죄중 37%가 허위신고로 집계됐다.
당직의 고통은 하위직 공무원만의 것이 아니다.
날짜개념 없는 철없는 아이의 『아빠,내일 또 오세요』라는 전송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 경찰서 모형사과장은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헤아려 보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한달은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선거 때문에 이미 한달전부터 시작된 「매일 당직」은 개표가 완료되는 내달 20일이나 돼야 풀릴 전망이다.
서울 남대문경찰서 배장석형사과장은 『대선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매일 당직을 해야겠지만 한달 이상 집에 못들어가는 것은 본인한테나 가족에게 상당히 괴로운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까만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대가로 받는 「철야수당」은 3천원으로 시간당 단돈 2백원꼴. 그나마 올해부터 1백% 오른 것이다.
고급인력의 근무수당으로는 턱없이 적은 액수로 해장국 한그릇 비우고 나면 목욕비도 남지 않지만,『공무원이니까…』하며 그러려니 한다.
근무 다음날 제대로 쉴 수 없는 것도 큰 고통.
맡고있는 업무를 동료에게 떠넘길 수 없어 점심먹고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것이 고작인 공무원들은 오늘도 『다음 당직이 언제더라…』 달력을 들춰 보며 집안일·약속·모임 등 여부를 확인한다.<박종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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