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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해부] 한국 뒤흔든 ‘분노’의 사건들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한국인 대학생 조승희가 저지른 미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은 세계를, 더더욱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그 시작은 세상에 쥐어박히며 스스로 삶의 구석으로 몰아간 한 젊은이의 맹목적 증오와 분노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를 놀라게 했던 ‘분노의 사건’들을 되짚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은 으레 범행의 잔인함, 피해자의 수, 연쇄성 등으로 일반 강력사건과 구별된다. 그것은 유형별로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살해하는 묻지마 살인, 연약한 대상을 골라 연쇄적으로 해치는 연쇄살인, 자신의 가슴속 분노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다수를 대량살상하는 다중(多衆)살인 등으로 가를 수 있다.

전국 오지를 돌며 17명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 사건이나 21명의 피해자를 낸 살인마 유영철 사건, 막가파식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막가파의 살인이 묻지마 유형의 사례다. 이에 비해 경기도 화성의 부녀자 연쇄납치폭행 살인 사건은 연쇄살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과, 분노에서 촉발된 다중살인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하나는 ‘묻지마 범죄’나 연쇄살인이 정신병자 또는 성격파탄자의 범행인 데 반해 ‘분노의 다중살인’은 범행을 저지르는 자의 정신상태나 생각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멀쩡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범행 대상의 무차별성이다. 취약하거나 특정한 대상이 아닌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동시 타격을 가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분노의 사건들은 다른 범행에 비해 그 사건을 기록한 조서가 좀 더 길다. 범인들을 분노하게 한 전사(前史)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뒤흔든 분노의 다중살인 사건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무엇이 그들을 분노하게 했는가? 희생자 수로 보면 아마 그 첫 번째 기록은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이 될 것이다.

▶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의 현장.

대구, 2003년
-운전기사로 일하던 평범한 가장,
지하철 다중 향해 불 던졌다

아내와 남매를 둔 평범한 가장 김대한 씨. 영업용 화물차를 운전하던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성실하게 일했다. 그에게는 돈이 좀 모이면 개인택시를 몰 수 있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화물차 운전 6년여 만에 꿈을 이뤘다.

김씨는 택시기사를 하게 된 이후에도 과로로 입원해야 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와 가족의 이 소박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50세 되던 1999년 불행이 찾아왔다. 건강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뇌졸중의 한 증상인 뇌경색이 왔다. 뇌경색은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과 달리 뇌혈관의 혈액순환장애를 일컫는다. 이로 인해 김씨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는 지속성 동통(疼痛)장해에 시달려야 했다. 정기 통원치료를 받아가며 힘겹게 생활하던 그였지만 완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2001년 봄부터 뇌졸중이 악화됐다. 실어증에 우측 하반신 마비 증세가 겹쳐 ‘뇌병변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김씨는 투병 의지를 잃지 않았다. 6개월 동안 병원에 다니며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차도가 없었다.

김씨는 분노와 좌절감에 빠졌다. 가족과 이웃들은 그가 이 무렵부터 “자포자기하는 언행과 울 때가 많았다”고 전한다. 동네 한 다리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미수에 그치는 등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며 수차례 소동을 벌인 그를, 가족은 파출소와 병원 등의 연락을 받고 데려와야 했다. 그는 결국 2002년 여름부터 우울증 증세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처지가 됐다.

으레 겨울은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2002년 겨울은 김씨 생애에서 아마 가장 길고 춥고 메마른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 겨울이 다 가기 전인 2003년 2월7일 김씨는 다시 파출소로 연행됐다.

그가 재활치료를 위해 다녔던 병원을 찾아가 “병원이 치료를 잘못해 내가 이렇게 됐다. 다 불질러 죽이겠다”며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여느 때처럼 그를 달래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김씨가 이날 병원에서 터뜨렸던 울분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소동이 있고 나서 열하루 뒤인 2003년 2월18일 오전 8시 무렵. 환경미화원이던 부인과 회사원인 아들과 딸 등 가족이 모두 출근하자 김씨는 입고 있던 체육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동네 주유소에 들른 그는 7,000원을 주고 휘발유를 한 되 사고 구멍가게에서는 350원짜리 1회용 라이터를 샀다. 휘발유를 산 것에 대해 그는 나중에 경찰에서 “자살하려고 했으나 혼자 죽는 것보다 많은 사람과 함께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휘발유통을 한 손에 든 채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지하철 2호선 내당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정해 놓은 행선지는 없었다. 앞서 “많은 사람과 함께 죽어야겠다”던 그의 말처럼 막연히 사람이 많은 곳, 그러니까 지하철과 (번화한) 중앙로역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반월당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그가 중앙로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53분. 집을 나선 지 2시간쯤 지난 뒤였다. 그가 탔던 열차는 1079호. 맞은편 선로에는 1080호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려던 참이었다. 자신이 탄 1079호 열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김씨는 휘발유통 뚜껑을 돌려 열었다. 휘발유 냄새가 확 퍼지는 가운데 김씨는 휘발유통 주둥이에 대고 라이터를 2, 3회 켰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대구지하철 화재현장에서 지하철 관계자들이 사고 전동차를 조사하고 있다.

무기징역 살다 지병으로 사망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휘발유가 터지며 불길이 타올랐다. 자신도 놀란 김씨는 반사적으로 불 붙은 휘발유통을 집어던지고 닫히려는 지하철 문밖으로 몸을 피했다. 이내 문은 닫히고 불길은 삽시간에 지하철 내부로, 외부로, 이어 맞은편에 진입해 정차했던 1080호 열차로 확 옮겨 붙었다. 참극은 그렇게 빚어졌다.

이날 김씨의 방화로 숨진 사람만 192명, 부상자는 148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사건,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분노한 한 사람에 의해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고 직후 대구시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고 지하 밀폐공간에 대한 안전대책이 사회 이슈가 됐을 만큼 사고의 파장도 컸다. 범인 김씨는 2003년 말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04년 초부터 경남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그해 8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모든 것을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이 사건의 발단은 살아보려고 애썼던 의지가 꺾인 한 사람의 좌절과 분노로 귀착된다. 수사당국과 보건복지부는 김씨가 “정신질환자가 아님”을 공식 발표했다. 그것은 곧 김씨가 좌절에 따른 분노, 다시 분노에 따른 복수심으로 다중(多衆)에게 공격을 가한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법정의 최후진술에서도 “죽여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렵게 모아 ‘개인택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김씨에게 그것은 여러 가지 벅찬 의미를 갖는 일이었을 것이다. 안정되고 번듯한 자기 사업체가 생겼을 뿐 아니라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무너졌다. 좌절감과 함께 분노는 쌓여갔고, 그것은 어처구니없게 애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대구, 1991년
-‘돈도 없는 촌놈’ 냉대에 나이트클럽 불지른 영농후계자

어려움 끝에 희망을 발견한 사람의 그 ‘희망’에 대해 거는 기대는 일반인의 그것보다 으레 더 크게 마련이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그 희망이 꺾일 때의 좌절감 역시 클 수밖에 없다. 20대 영농후계자 김정수 씨. 누가 보아도 그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이다.

고향은 지금은 김천시로 통합된 경북 금릉군. 오직 농사가 할 일의 전부인 전형적인 시골에서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왔다. 농사가 가업인 집안에서 부친이 일찍 작고했으니 형편이 어떠했을지는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가난한 중에도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며 내일을 준비했다. 그런 그에게 스물아홉 살이던 1990년 한 해는 최고의 해였다.

홀어머니와 단출하게 살던 그는 일찍 결혼하기 위해 수십 차례나 선을 보았으나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가로로 보나 세로로 보나 크게 볼 것 없는 농촌총각에게 시집올 처녀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 살을 넘기지 않고 결혼에 성공(?)한 것이었다.

또 그는 금릉군의 영농후계자로 지정됐다. 영농후계자가 되려면 영농경력·영농의욕·영농계획 등 5개 항목을 심사받아야 하는데, 그는 착실한 준비를 거쳐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덕분에 농협에서 1,100만 원의 영농자금을 지원받아 남의 땅을 부쳐먹던 생활을 청산하고 비로소 자기 논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는 이제 가정과 땅을 가지고 남부럽지 않은 출발선에 서게 됐다. 그러나 행복은 순식간에 깨졌다.

하루아침에 용서받지 못할 방화살인범으로

먼저 부인과 헤어져야 했다. 결혼하고 보니 부인은 원인 모를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두 달이 채 못 돼 김씨는 이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렇다고 실의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새봄부터 그는 땅에 희망을 걸고 다시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나 땅에 뿌린 꿈마저 장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태풍이 닥친 것이었다.

1991년 8월 글래디스로 이름붙여진 태풍이 호남 쪽을 통해 들어와 한반도를 강타하고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글래디스는 사망자만 91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냈다. 특히 태풍의 피해는 진행 방향에서 오른쪽이 큰 법. 영남지역이 태풍에 심하게 두들겨맞았고 김씨의 농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무럭무럭 자라던 벼포기가 하루아침에 바람과 물살에 쓰러졌다. 자기 돈도 아닌, 영농자금으로 지은 농사였다. 그쯤 되면 김씨가 아닌 누구라도 삶의 의지가 꺾였을 것이다.

속수무책, 손 쓸 도리는 없었다. 좌절하던 그는 대구 시내로 나와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했다. 사건은 그가 그처럼 실의 속에 방황하던 10월17일 밤에 터졌다.

이날도 김씨는 친구 3명과 어울려 대구시 비산동의 한 맥주집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다. 밤 10시 가까이 되어 술이 조금 취한 상태로 2차로 술 마실 곳을 물색하던 그의 눈에 휘황한 네온사인이 들어왔다. K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하 클럽에 들어가려던 (누추했을) 그를, 입구에 섰던 술집 종업원들이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제지당한 것이 아니라 김씨는 (나중에 그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종업원 중 누군가 그를 향해 “돈도 없는 촌놈이 이런 데를 다 온다”고 내뱉는 말을 들었다.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곳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주유소로 달려갔다. 6ℓ들이 통에 휘발유 4ℓ를 사든 그는 다시 예의 나이트클럽으로 돌아왔다. 클럽 입구에서 제지당했던 그는 두리번거리며 클럽 뒷문을 찾았다. 그런 정황으로 보아 그의 정신은 멀쩡한 상태였다.

뒷문으로 들어간 그는 클럽의 어둠을 타고 홀의 중앙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머뭇거림 없이 통 뚜껑을 열고는 무대 바닥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가 라이터를 켰고, 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불을 지른 그는 후닥닥 밖으로 달아나다 입구에서 종업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그 순간 클럽 안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클럽 안에서 술을 마시던 주객들은 클럽 측이 무대효과를 위해 불을 지른 것으로 착각하고 곧바로 몸을 피하지 않았다. 더욱이 불이 나면서 곧 전기가 나갔고, 암흑으로 변한 클럽 안에서 사람들은 좁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유독가스에 질식됐다. 그 바람에 급히 출동한 소방대가 15분 만에 불을 껐지만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16명이 숨지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어렵사리 결혼한 아내와의 어이없는 결별, 희망을 걸었던 농사의 좌절로 가슴속에 폭탄이 재여 있던 김씨에게 ‘돈도 없는 촌놈’이라는 말은 ‘북’ 성냥을 그어 댄 것이었다. 김씨는 경찰에서 그 순간을 “뭔가 분노가 치밀었고, 그때부터 앞뒤 가릴 수 없었다. 불을 지르면 손님들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땅에 희망을 걸고 땀흘려 일하던 영농후계자 김씨는 하루아침에 용서받지 못할 방화살인범이 되고 말았다. 대구고등법원은 “아무리 영농후계자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주장해도 선량한 사람을 대상으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16명을 사망하게 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서울 여의도, 1991년
-선천성 약시로 일자리 쫓겨다니다
광란의 질주 택했다

서울 여의도광장에 시민공원이 생기기 전인 1991년 10월18일 토요일. 그때나 지금이나 여의도광장은 차량 진입이 금지돼 주말이면 시민들이 산책하거나 어린이들이 자전거·롤러스케이트·카트 등을 마음껏 탈 수 있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시민들이 몰려나와 가을의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예기치 못한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이 평화로움은 순식간에 깨졌다. 오후 4시 반 무렵. KBS 정문 주차장의 초소 옆길에서 튀어나온 프라이드 승용차가 KBS 쪽 건물과 광장을 가르고 있던 편도 2차선 차도를 가로질러 곧장 돌진해 들어온 것이다.

운전미숙이나 길을 몰라 잘못 들어선 것이라면 차가 광장에 진입하자마자 속도를 늦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 프라이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대로를 달리듯, 광장에서 마포대교 쪽을 향해 질주했다. 그것도 마치 운전자가 정신을 잃은 듯 차량은 일직선으로 달리지 못하고 지그재그를 그리며 불안정하게 달렸다.

500여m를 달리는 잠깐 사이 2명의 어린이를 비롯해 10여 명이 차에 치여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유아용 전기자동차와 충돌하자 프라이드는 동아일보사 별관 앞에서 방향을 틀어 이번에는 국회 쪽으로 광장을 질주했다. 역시 불안정한 운전이었고 그러면서 다시 8명을 덮쳤다.

광란의 질주가 멈춘 것은 차량이 한 자전거 대여대를 들이받고 나서였다. 어린이들에게 빌려주기 위해 죽 세워 놓은 자전거와 유모차가 쓰러지고 부서지며 차 바퀴 사이에 끼이자 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프라이드 주변으로 달려들어 차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긴 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내 운전자는 기어와 핸들을 거칠게 조작하며 차를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 1991년 여의도광장 폭주 사건의 범인인 김용제 씨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차가 끝내 움직이지 않자 운전자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왔다. 손에는 20cm 길이의 등산용 칼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좌우로 휘두르며 그는 전경련 회관 쪽으로 달아났다. 시민들이 그를 쫓아가자 그는 얼마쯤 달아나다 여학생 1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그를 에워싼 시민과 대치하던 그는 돌연 자신이 목을 조르고 있던 여학생의 복부를 칼로 찔렀다.

그 순간 시민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제지하고 붙잡아 상황은 끝났다. 다행히 칼은 허리띠 금속 버클에 닿아 여학생은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 광란의 질주는 천진난만한 어린이 2명을 숨지게 하고 21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등 보상받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초래했다.

도대체 범행을 저지른 운전자는 누구이며,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인 것일까? 경찰 조사의 결론은 ‘세상에 분노한 한 젊은이의 눈먼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저 연명하는 일’마저 쉽지 않았다

범인은 21세의 무직자 김용제 씨. 충북 태생인 그는 다섯 살 때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가출했다. 아버지마저 1983년 농약을 먹고 자살하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을 나와 타향 객지로 떠돌았다. 집도 돈도 돌봐줄 이도 없는 데다 배운 것도 없는 그의 떠돌이 도시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온갖 막일과 단순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장 등지를 돌아다니며 연명했다. 그러나 그처럼 ‘그저 연명하는 일’마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2m 정도 앞도 뿌옇게 보이는 선천성 약시였다. 그 때문에 어찌어찌 일자리를 얻어도 얼마 못 가 쫓겨나고는 했다. 결국 흘러흘러 그는 거리로 내몰리는 처지가 됐다. 더 이상 가진 것도, 들어갈 곳도 없게 된 김씨는 범행 사흘 전에는 지하철 벤치에서, 이튿날은 공사 중이던 가건물에서 잤다. 그 이틀 동안 그가 먹은 것은 빵 몇 조각이었다.

허기와 한기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이 한때 일했던 한 양말공장 사장집을 기억해 내고 그의 집 부근으로 갔다. 열쇠가 꽂힌 채 주차된 사장의 차를 발견한 그는 무작정 차를 몰고 달아났다. 면허는 없었지만 공장 등지로 다니면서 이따금 장난삼아 차를 몰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차를 운전할 수 있었다.

차를 훔친 김씨가 도착한 곳은 여의도 KBS 부근의 여의도광장 주차장. 그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시 한나절을 머물렀다. 그리고는 10월18일 오후 차를 몰고 광장으로 돌진했다. 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순간까지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경찰과 법정에서 그가 한 진술은 이렇다.

“들어간 직장마다 눈이 나쁘다고 쫓겨났다. 사장들은 나를 이용만 해먹고 무자비하게 해고했다. 세상은 나를 냉대했다. 죽고 싶었다. 그럴 바에는 세상에 복수나 하고 죽고 싶었다. 광장으로 돌진한 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개로 보였다. 처음 차에 누군가 부딪치고 나서는 눈을 감고 달렸다.”

세상으로부터 내몰린 한 젊은이의 복수심, 그것은 고귀한 생명을 빼앗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다. 정신착란이 아닌 ‘사리분별이 가능한 상태에서의 의도된 범행’임을 확인한 법정은 김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7년, 서울 을지로
-새 휴대전화 통화 불량 항의하다 끝내
벤츠 타고 회사 문으로 돌진

“내가 바보입니까? 이거, 이 56만 원짜리 휴대전화 때문에 1억5,000만~2억 원 하는 벤츠를 거기에 들이밀게…. 거기 찾아갈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런데 원체 화가 나게 하니까…. 그 회전문 안에서, 그 안에 목이 잘못 끼이면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경비원 셋이 나를 제지하느라 팔을 붙잡고, 목에 상처를 내고….”

4월10일 저녁 서울 남대문경찰서 형사계. 검은 가죽점퍼 차림에 수갑을 찬 40대 남자가 새것으로 보이는 폴더형 휴대전화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기자들을 향해 열변에 가까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 휴대전화 해외 로밍이 잘 되지 않아 서비스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화가 난 김정환 씨가 자신의 벤츠 승용차로 서울 을지로2가 SK텔레콤 본사 현관 회전문을 들이받았다.

김정환(47) 씨. 일찍이 30대 때부터 일본·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통해 부를 쌓았다. 일본의 한 선교회 소속 선교사이기도 한 그는 한·중·일 3개국에서 꾸준히 선교와 봉사활동을 해왔다. 한국에서는 경기도 성남의 한 노인전문병원의 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무보수로 노인 수발, 목욕 등 봉사에 충실했다.

그런 그가 왜 경찰서에 수갑을 찬 채 붙들려온 것일까? 사건을 뒤에서부터 하나씩 지워나가면 통신회사에 대한 그의 불길 같은 분노가 알맹이로 남는다.

짜증과 울분 차곡차곡 쌓였을 터

사업차 한·중·일 3국을 오가던 그는 통신회사의 로밍 서비스(국내에서 가입한 전화번호 그대로 국제통화를 할 수 있는 서비스)가 불편해 아예 한 달 전인 3월13일 국제통화가 자유롭다는 전화기를 장만하고 SK통신의 관련 서비스에도 가입했다. 이른바 글로벌 로밍 서비스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전화는 외국에서 잘 터지지 않았고, 그는 제대로 전화를 이용하지 못한 채 귀국했다.

새로 산 전화기인 만큼 전화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김씨는 귀국 후 주거지 관할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 “국제통화는 고사하고 국내통화도 제대로 안 된다. 휴대전화에 문제가 있으니 대체 휴대전화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3월과 4월에 걸쳐 두 차례나 본사를 찾아가 상담 직원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휴대전화 교환을 주장하는 김씨에게 직원은 “교환은 안 된다”고 거절했다.

‘통화가 될 줄 알고 샀는데 통화가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화가 날 일이다. 더욱이 ‘고객’이 자기가 구입한 물품의 문제점을 고쳐 받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 ‘공급자’를 찾아가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랴. 4월10일 김씨는 다시 시간을 내 세 번째로 SK텔레콤 본사를 방문했다. 속으로는 짜증과 울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터였다.

김씨가 타고다니던 차는 벤츠 S500 모델. 이날 SK 본사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그의 차에는 A4용지에 큼직하게 ‘불량 SK’라고 써붙인 글씨가 조수석 앞 유리창에 2장, 뒤에 2장 붙어 있었다. 이윽고 그가 건물 1층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원이 “차를 다른 곳으로 빼라”면서 그를 붙잡았다.

김씨는 “불법주차가 문제라면 경찰을 불러 법대로 하라”면서 제지를 뿌리치고 현관의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러나 경비원들이 달려와 그를 붙잡고 못 들어가게 계속 막으며 승강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김씨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터에 경비원까지 그러니 순간적으로 너무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경비원들에게 제지당한 그는 자신의 차로 돌아와 시동을 켜고 방향을 돌렸다. 차 머리가 향한 것은 자신이 제지당한 예의 회전문. 이미 화가 뻗친 그에게 그 순간 2억 원짜리 벤츠나 수천만 원 상당이라는 유리문 같은 것이 떠오를 리 없었다. 김씨는 그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법은, 누구나 분노할 수 있는 상황을 참작은 해도 분노하는 것 자체는 용서하지 않았다. 검찰은 김씨에 대해 재물손괴 등 혐의로 법원에 구속을 청구했고, 법원은 영장을 발부했다.

2007년, 서울 잠실
-교수 재임용 탈락 교수, 복직 희망
물거품 되자 판사에게 석궁 테러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매사 옳은 것을 고집하고 원리원칙을 따라야 할 것을 내세우지만, 세상이란 실제로 그런 사람은 달갑지 않게 여기기 일쑤다.

세상살이도 음식처럼 적당히 남과 섞이고 발효(?)돼야 둘둘 어울려 굴러가는 것이 차가운 현실이다. 실력파 수학자로 통하던 김명호(50, 전 성균관대 교수) 씨의 지난 날들이 바로 그런 사례가 될 것이다.

김씨는 1979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유학을 떠나 1988년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19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의 세계 정상급 수학 학회지에 3편의 논문을 게재하는 등 실력과 노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너무 꼿꼿한 것이 그의 인생에 굴곡을 가져왔다.

대학별 고사가 시행되던 1995년 그는 자신이 속한 대학이 그해 1월 실시한 입시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채점위원이던 그는 장을병 총장에게 서면으로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그러나 채점을 맡았던 수학과 교수들은 연석회의를 통해 시험문제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고 결론 내렸고 학교 측도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했다.

그쯤에서 ‘주변’에 묻혀 적당히 넘어갔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더더욱 꼿꼿하게 따지고 들었다. 다른 학교 교수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김 교수 입장에서는 부당한 일이었겠지만 학교 측과 다른 교수들 입장에서는 다분히 짜증스럽고 골치 아픈 돌출행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옆의 교수들이 김 교수의 징계를 요구했고, 학교 측은 그에게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다. 부교수 승진을 앞둔 시점이었으나 그마저 물 건너간 일이 됐다. 절치부심한 김 교수는 학교를 상대로 그해 10월 법원에 자신의 ‘부교수직 직위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수학문제의 오류 여부에서 시작된 문제여서 당시 재판부는 대한수학회와 고등과학원에 이에 대한 의견을 구했으나 응답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를 외곽에서 지켜보던 전국 44개 대학 189명의 수학과 교수가 연명해 재판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요지는 “김씨의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이공계 학술지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면서 ‘정직의 대가’라는 쪽, 그러니까 김 교수를 옹호하는 입장의 글이 실렸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김 교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더더욱 믿게 하고,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입시문제 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은 학교의 처분과 관계없다”며 학교 측 손을 들어주었다. 학교 측은 이어 이듬해 재임용 심사에서 김 교수를 탈락시켜 그는 강단까지 떠나게 됐다.

대학사회와 법조, 모두에 환멸을 느낀 김 전 교수는 1996년 뉴질랜드로 떠났다. 그는 그곳 한 대학의 수학과에서 무보수 연구교수직으로 일했으나 생활고에 쫓겨 1년 만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에도 미국의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거나 이공계 기업의 연구에 참여하는 등 활동했으나 정착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04년 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재임용 사항은 학교 재량’ 판결에 보복 대응

그런 그에게 마침 희망을 안겨주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의 복직이었다. 그는 앞서 1998년 자신이 속한 미대 교수들의 친일 행적을 논문을 통해 언급한 뒤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으나 소송 끝에 7년 만인 2006년 복직했다. 또 사립학교법 및 교육공무원법이 개정돼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은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나 법원 소송 제기도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그는 2005년 3월, 이번에는 교수 지위를 확인하는 소송을 다시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임용 사항은 학교 재량”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항소심에서도 김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상이 다 내가 옳다고 하는데, 법은 진실을 외면해 학교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했을 김 전 교수의 가슴속에는 울분이 쌓이고 또 쌓여갔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시점에 ‘법을 직접 단죄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주장이 좌절된 김 전 교수는 2006년 11월 종로 탑골공원 근처의 석궁 판매점에서 35만 원을 주고 석궁과 화살을 구입했다. 법규에 따라 경찰에는 레저를 위한 것이라고 신고했다. 회칼도 한 자루 구입했다.

그런 뒤 그는 인터넷에 공개된 공직자 재산명세를 통해 항소심에서 자신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서울민사고등법원 박홍우 부장판사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잠실 박 판사의 아파트를 찾아가 사전답사까지 했다.

2007년 1월14일 저녁. 김 전 교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포기할 수 없다. 법이 진실을 외면하는 만큼 내가 직접 세상에 진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이윽고 이튿날인 1월15일 오후, 석궁과 회칼을 석궁 케이스에 챙겨넣은 김 전 교수는 집을 나서 잠실로 향했다.

박 부장판사의 아파트 입구 층계에서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렸다. 6시 반쯤 박 부장판사가 아파트 외곽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본 그는 박 부장판사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박 판사, 그것도 판결이야?”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2m가 채 안 되는 지점에 도달한 순간 석궁이 발사됐다. 화살은 박 부장판사의 외투를 뚫고 복부에 2cm가량 파고드는 상처를 입혔다. 순간 박 부장판사의 비명을 들은 운전기사와 경비원이 달려와 김 전 교수를 붙잡았다.

경찰에서 그는 “합법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했는데도 법이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법부가 얼마나 법을 무시하고 썩었는지 알리고 싶었다”며 분노의 진술을 해나갔다.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던 김 전 교수, 그는 지금 법정의 피고인으로 서 있다.

1982년, 경남 의령
-불우하게 자라 ‘시골 권력자’ 된 순경의
천인공노할 살인극

경남 의령군 궁유면은 지금도 한적한 농촌이다. 그중에도 토곡리는 예나 지금이나 개발 붐에 휩쓸리는 법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한 조그만 촌락이다.

지금도 그러니 20여 년 전인 1982년에야 두메라고 불릴 만한 곳이었다. 외부와 전화 한 통화를 하려고 해도 면장댁을 찾아가 전화기를 빌리고, 그나마 다시 동네 우체국 교환을 통해야 했던 오지다.

지금이야 ‘봉사·친절·친구’ 등을 강조하며 경찰관이 지역 주민에게 몸을 낮추지만, 그때만 해도 경찰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껄끄러운 존재였다. 더욱이 파출소도 아닌 지서(支署) 정도가 설치된 토곡리 같은 시골에서 경찰은 곧 권력자였다. 이곳 궁유지서의 우범곤 순경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1982년 당시 27세였던 우 순경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또 어떤 경로로 경찰이 되었는지 세세히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경찰이라는 권력을 입은 뒤부터다.

이미 경찰이 되기 전부터 그는 동네에서도 완력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셌다. 180cm의 키에 우람한 체격으로 그는 한가락 하는 힘꾼으로 통했다. 그런 그가 경찰이 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작은 마을의 골목대장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술버릇까지 좋지 않아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슬금슬금 피했다.

그 바람에 그는 연애다운 연애도 못해 보고 동네 한 처자(J씨, 1982년 당시 25세)와 결혼을 미룬 채 내연관계로 지냈다. 문제는 이 내연녀와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궁벽한 지서의 말단 경찰인 우순경의 처지와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정을 놓고 J씨는 푸념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우 순경은 술을 마시고 소동을 부렸다.

사건이 일어나던 4월26일에도 우 순경은 아침부터 J씨와 심하게 다투었다. 그러고는 저녁이 되기 전에 술을 들이켰다. 만취한 그는 J씨를 찾아가 다시 행패를 부리며 싸웠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그는 분을 풀지 못한 채 궁유면에 있던 지서로 돌아왔다. 마침 지서장 등 다른 직원들은 그날 낮 지역 행사가 있어 외유를 떠난 터였다. 씩씩거리던 우 순경은 지서 뒤편 예비군 무기고를 열고 수류탄 7발과 카빈 소총(개머리판을 떼어내 총신만으로 격발할 수 있게 한 소총) 2정, 실탄 180발을 들고 마을로 나섰다.

▶ 한 경찰관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 끝에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지서 무기고에 보관 중인 카빈과 수류탄을 들고 나와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 56명을 죽이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던 참혹한 사건 현장.

반상회 뒤풀이 자리에 수류탄 던져

술에 취했다고는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총을 들고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바로 지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우체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24시간 자리를 지키던 전화교환원에게 총을 쏴 살해함으로써 외부와 통신을 끊었다.

그러고는 이때부터 면과 붙어 있는 인근 토곡·석정·매곡·당동 마을 등을 돌며 닥치는 대로 총질을 해댔다. 가까스로 탈출한 주민의 신고로 의령경찰서에서 경찰 진압대가 출동해 우 순경을 추격했지만 허사였다.

우 순경은 길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무조건 쏘았다. 밤이 깊어 길에 다니는 사람이 적어지자 불 켜진 집을 겨누어 총을 난사했다. 행인이 적은 시골의 밤시간 동안이었지만 인명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공교롭게도 사람이 모여 있던 두 곳에 우 순경이 들이닥친 때문이었다.

한 곳은 반상회를 마치고 주민들이 모여 뒤풀이담을 나누던 동네 구멍가게. 우 순경은 그곳에 수류탄을 던지고 카빈총을 휘둘러댔다. 또 다른 한 곳은 옆 마을의 한 상가(喪家). 그 집 마당에서 밤샘지기를 하던 문상객들이 대거 희생됐다. 모두 우 순경을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새벽 5시 무렵 우 순경이 마지막으로 토곡리 인근 평촌리의 한 주민 집에 들어가 수류탄으로 자폭하기까지 8시간 동안 일대는 공포의 도가니가 됐다. 상황이 종료된 뒤 사망자는 56명에 달했고, 부상자도 34명이나 됐다.

생후 1주일 된 아기와 70세 넘은 노인도 희생됐다. 그야말로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한 한 경찰관의 천인공노할 무차별 살상이었다.

전문가 견해(1) 김용구(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과장) 교수

자신감 없을수록 공격성 커지는 ‘경계선 인격장애’

분노는 에너지다. 공격적 에너지다. 그 같은 공격성이 밖의 다른 대상을 향하면 가해 행위가 되고, 안으로 향하면 자살하게 된다. 특징은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분노에 의한 비이성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경계선 인격장애’라고 한다. 진료실을 찾아오는 환자 가운데는 이런 질환을 호소하는 이가 적지 않다. 마음속 분노를 풀지 못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생물학적으로는 두뇌의 세로토닌 시스템 기능이 저하된 상태다. 우리 뇌의 앞부분, 곧 전두엽에서는 항상 세로토닌 시스템이 작동한다. 동물적 본능, 충동을 억제하는 기능이다. 여기에 장애가 오거나 기능 저하가 오면 공격성이 표출된다.

물론 생물학적 요인만이 분노를 형성하고 공격 행위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환경 요인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분노가 쌓인 사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뇌에서는 세로토닌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자신감·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자신감이 없을수록 분노에 따른 공격성은 커진다. 그럴 경우 폭발하는 분노는 오로지 목표만 생각할 뿐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그 행동 이후의 결과나 처벌, 파장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특히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 같은 경우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해오면서 끊임없이 자신감이, 자존심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적개심만 키우던 그는 평범한 정신상태에서 발작적인 공격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분노 관리’에 대한 각성과 관심이 필요하다.

전문가 견해(2) 조은경(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쌓인 분노 어떻게 터뜨릴까’만 생각하다 끝내 폭발

분노가 형성되는 대표적 요인은 좌절이다. 좌절의 원인이 자기 아닌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 때 분노는 쌓인다. 지금 자신의 처지, 자신의 문제가 자기 책임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생각이 좌절을 부르고 분노로 축적된다.

분노의 속성은 한마디로 불쾌감이다. 따라서 일단 분노가 형성되면 그것을 회피하려는 본능이 발휘된다. 아예 분노의 원인을 잊으면 모를까, 참고 넘어가는 것은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가 쌓이면 오직 그것을 어떻게 터뜨릴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누가 됐든 일단 분노가 쌓이면 외부의 대상을 겨냥해 공격을 ‘가하려는(strike out)’ 충동을 갖는다. 행동으로 옮기느냐 옮기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누구나 그런 충동을 갖는다. 다만 대다수가 그것을 공격적 행동으로 터뜨리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자아가 약한 사람, 자존심이 약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분노를 바깥의 공격적 행동으로 터뜨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을 겨냥한 분노의 폭발은 어디까지나 개인 차원의 문제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성격의 강약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어떻게 분노가 공격적 행위로 표출될 것인가 예상하기도 어렵고 통제도 어렵다.

더욱이 한국사회는 워낙 경쟁과 생존 스트레스가 심하다. 분노를 일으킬 요인이 많다. 그런 가운데 살다 보니 사람들은 어지간한 자극에도 둔감한 편이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어떤 계기가 주어질 때 무의식에 쌓인 일상의 분노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 의해서든 폭발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 간에 합리적으로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또한 세밀하게 구축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문가 견해(3) 홍성열(강원대 심리학과) 교수

공동체 소외자 방치하면 결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모든 정신병, 모든 범죄행동의 근본 원인이자 공격적 에너지를 분노라고 본다. 분노가 그런 증상과 현상의 공통분모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활동한다는 것은 곧 사회활동을 의미한다. 분노는 그러한 정상적 사회활동이 차단된 상태다. 그런 이들은 자기만의 세상에서 산다. 그러면 그 안에서 다시 분노는 더욱 축적돼 간다.

총기난사 사건이나 지하철방화 사건, 광장으로 차량을 돌진한 사건을 일으킨 이들의 공통적 심리상태는 사회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여타 연쇄살인 등과 달리 연약한 여성 등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증오와 분노인 만큼 가급적 많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공격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가공할 일이다.

개개인의 성격을 다 따져가며 분노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수십 년 동안 형성된 개인의 성격을 바꾸는 데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분노 사건을 막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우리 사회의 허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추적해 끈질기게 하나하나 막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김영현_월간중앙 객원기자 ultarik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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