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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 "언론은 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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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언론은 야수와 같다"며 신랄히 비난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라크전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언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블레어 총리는 12일 런던 로이터통신 본사에서 그동안 쌓였던 언론에 대한 불만을 작심한 듯이 털어놓았다.

블레어는 "치열한 기사 경쟁을 하고 있는 오늘날 언론은 낙종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떼거리로 사냥감을 찾는다"며 "이런 점에서 언론은 사람들과 평판을 갈가리 찢어놓는 야수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 매체와 블로그, 24시간 뉴스 채널의 등장으로 미디어 산업은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고 있다"며 "이러한 환경에서 언론들은 정확한 보도보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더 선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영국 미디어의 수준이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날 연설에서 "언론과 정치인의 관계가 훼손됐고, 정치인이 나라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역량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 블레어 총리와 같은 고위 정치인이 언론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영국은 정치인에 대한 언론의 공격 수위가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지난 10년간의 재임 기간 중 블레어는 언론 플레이에 능해 '홍보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날 연설에서 그는 집권 초기에 적대적인 보수 언론을 설득하고 달래려 했던 뉴레이버(새 노동당)의 노력이 이런 문제점들을 키웠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2주 뒤 퇴임하는 블레어는 많은 망설임 끝에 이날 연설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국 신문들은 즉각 블레어의 언론관을 반박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설에서 "언론도 잘못을 많이 했지만, (블레어 총리에 대한 비판을 부른) 이라크에 대한 치명적인 판단 실수는 블레어 정부가 범한 것"고 지적했다.

타블로이드 신문인 '더 선'의 전 편집간부 트레버 카바나흐는 "블레어는 어떤 지도자보다 언론이 우호적으로 대했으며, 혜택을 많이 받았다"며 "이 우호적인 보도 태도가 바뀐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 탓이 아니라 이라크전에 대한 블레어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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