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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실체 드러낸 신 군부|12·12사태로|정국 급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1980년 초여름 어느 날,
김원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국보위상임위원장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씨(68·현 국민대 이사장)는 그해 5월 21일 단행된 개각 때 재무부 장관에서 부총리로 영전했었다.
『전 위원장이 전화로「잠깐 만나 볼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내가 그리로 찾아가겠다고 했지요.』
김씨는 지금은 문화부와 공보처가 함께 들어있는 당시 기획원청사를 나서면서『부총리자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그만큼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셌다. 바로 직전인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하던 날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로 민간인 1백 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모두 1백 70명이 사망했다』고 동시에 발표했다.. 신 군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같은 날짜 신문지면을 큼직하게 장식한「국보위발족」과「1백 70명 사망」은 동전의 앞뒷면이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침묵이 온 나라를 덮고 있었다.
전 위원장이 있는 국군보안사 건물은 승용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김원기씨의 계속되는 증언.
『전 위원장이 나를 만나더니 이러더군요.「일을 많이 하려다 보니 돈이 아주 부족합니다. 지금 예비비가 어느 정도 있습니까」라고요. 내가「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되물었지요.「1백억 원이면 되겠습니다」고 해요. 당시 예비비로 1백 50억 원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쪽에서도 예산현황을 다 알아보고 요구한 것 아니겠습니까. 알겠다고 대답하고 물러 나왔지요. 거역할 분위기가 도저히 아니었어요. 최규하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니까 그냥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할 수 없지」라시면서요. 그 다음 날인가 바로 국무회의가 열려 요구한 액수대로 예비비 지출 건이 의결됐지요. 나야 어차피 단명일 것을 알면서도 최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부총리가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한스러운 일도 많았습니다. 국무회의 때는 장관들이 서로 눈치나 살펴야 했고… 대통령이나 우리나 서로 동병상련 격이었다 고나 할까요.』

<비밀리에 개헌 추진>
79년 10·26이 터지면서 청와대 비서실은 물론 경호실·중앙정보부·내각 등 권력기관들은 오리무중의 혼돈 속에 내던져졌다. 장기간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에게 국가권위가 집중됐던 탓에 그 하룻밤 사이에 발생한 권력의 공백은 쉽게 메워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박 대통령은 서거 전 비밀리에 개헌작업을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언제 개헌을 단행할 것이며, 새 헌법이 시행되면 대통령은 바뀌게 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절대권력자인 박 대통령에게 감히 하야일정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개헌이 검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측근들이 유신헌법상의 대통령 임기(6년)나 유정회 의원 임기(3년)등을 근거 삼아 혼자 속으로 대통령의 하야시기를 점쳐보는 정도였다.
『79년 2월께 박대통령을 독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대통령께서「내가 무한정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지」라고 말했어요. 특정시기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임기 전에 후계자를 물색해 정권을 넘기겠다는 말도 하셨지요.「나라의 각분야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고 그 궤도가 허물어질 염려가 없다고 생각될 때 물러나야겠다. 김 장관도 내 구상이 그렇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어라」는 말씀이었어요. 나는 그때 박 대통령께서 83년, 늦어도 86년께 에는 물러날 것 같다는 짐작이 들었어요. 84년이면 대통령의 6년 임기가 끝나니까 임기전이라면 83년께 일 것이고, 더 늦어지더라도 다음 임기 전반에는 물러날 것이라는 추측이었습니다.』(김치열 전 법무장관)
10·26사태로 박 정권 말기의 비밀스러웠던 개헌논의는「없었던 일」로 묻혀버렸다. 대신청와대 깊숙한 곳에서가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일반에서 광범위한 개헌요구가 일었고, 유신헌법폐지는 며칠사이에 당연지사로 떠올랐다.

<국장 이후 매일 모여>
정국전반에 민주화에 대한 희망과 함께 상당한 무게의 불안감도 교차하는 가운데 몇몇 정부 각료들은 거의 매일 삼청동 총리공관에 모여 수습책을 논의했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국무총리) 신현확 부총리·박동진 외무·구자춘 내무·김치열 법무·노재현 국방·김성진 문공 장관 등이 그 멤버였다.『현행헌법(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헌법을 개정해 그 헌법에 따라 다시 선거를 치른다』는 최 권한대행의 시국담화문(79년 11월 10일)이 구상된 것도 이 모임에서였다.
김치열씨(71·현 제일생명 고문)의 설명.
『박 대통령의 국장을 치른 직후부터 매일 모였습니다. 국난 속에서 북한의 남침위협에 대처해야 했고 국내 정치일정을 어떻게 짜서 권력구조의 공백을 메우느냐도 과제였지요. 최 권한대행이 적극적으로 자진해 나서지는 않았으나 모임에 참석한 장관들은 그 분이 대통령에 출마해야 한다는데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후 개헌안을 마련하고, 헌법개정 국민투표와 대통령·국회의원선거를 치러 나라의 새 체제를 갖추는데 1년 내지 1년 반정도 걸릴 것이라는 예측에도 대체로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었어요. 대통령 직선제나 유정회 폐지 등 상세하지 않으나마 개헌방향의 대강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이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일각에서는「무슨 소리냐, 6개월이면 충분한데 왜 늦춰 잡는가」라며 마치 우리에게 저의라도 있는 듯이 나왔지만 삼청동 모임은 결코 사심을 깔고 진행됐던 게 아닙니다. 12월 초순까지 모임은 이어졌지요. 그러나 12·12사태가 터지자 회의고 뭐고 유야 무야 됐어요. 판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탓이지요.』

<내용도 모르고 보고>
법과 제도가 아닌 벌거벗은 무력에 의해 권력판도가 결판난 12·12사태 앞에서 행정부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일 국의 부총리이자 경제총수가 육군 중장(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무실에 불려가 정부예산 중 1백억 원을 떼 주기로 약속하는 기이한 현상도 이때부터 그 싹이 돋은 셈이었다.
79년 12월 12일 밤 중앙청의 한 부처에서 당직근무를 했던 A씨의 회고.
『지나고 보니 엄청난 일이었더군요. 나는 그때 풋내기 사무관이었어요. 밤중에 합참 상황실장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오는데, 무장괴한들에게 참모총장이 납치됐다는 둥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둥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통보들 뿐 이었어요 .최 대령으로 기억되는 그 상황실장은 사태 후 예편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내 상급자에게 보고했지요. 그 분도「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말만 되풀이하더군요. 보고자 자신이 상황을 모르니 보고 받는 사람도 영문을 알 까닭이 있습니까. 자정이 지나고 얼마 후 최 대령과 통화하니 그때는 이미 말투가 달라졌어요.「무장괴한」이 누구냐고 재차 물으니까 풀죽은 목소리로 「그분들이 지금 와 계십니다」라는 거예요. 상황이 끝난 것이지요. 뒤에 알았지만 신군부 측 공수단이 점령을 완료한 시점이었어요.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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