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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숙성을 시작한 와인 같은 여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호 03면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이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지었다는 ‘동작대부(東雀臺賦)’의 구절을 슬쩍 바꿔쳐 주유를 흥분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유가 격분한 것은 조조가 강동 일대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이교(二喬) 자매를 탐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교가 누군가. 언니 대교는 죽은 친구 손책의 아내, 동생 소교는 주유의 아내였다.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이 두 미녀로 인해 천하의 영웅들은 마침내 세 나라로 편을 갈라 맞붙게 된다.

영화배우 송혜교

그 시절 이교가 논란의 초점이었다면 지금 한국 영화계에선 혜교(慧喬)에 시선이 몰린다. 송혜교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가 이번 주말 관객의 심판대에 올랐다. 심은하를 키워낸 사람으로 유명한 이춘연 ‘시네2000’ 대표는 ‘황진이’ 시사회장에서 “한국 영화는 앞으로 10년간 여배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시사 이후에도 영화 ‘황진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어쨌든 송혜교는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제작 전부터 워낙 적역이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오갔던 것을 감안하면 송혜교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하다.

1996년, 김국진과 함께 한 컴퓨터 광고에서 ‘밤 새우지 말란 말이야’라는 광고 대사를 히트시키던 열네 살 때 이후 송혜교는 중요한 대목마다 적역 논란의 대상이 됐다. ‘한류’의 기원을 만든 작품으로 꼽히는 ‘가을 동화’ 오디션 때도 윤석호 감독은 “너무 하이틴 이미지가 강하다”며 송혜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쨌든 송혜교는 역할을 따냈고, 동아시아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이병헌과 공연한 ‘올인’ 때에도 최완규 작가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헌에 비해 너무 어려보여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걸로도 부족했는지 송혜교는 아예 보란 듯 이병헌과 연인이 되어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선언했다.

영화 ‘황진이’의 경우엔 어땠을까. 드라마 ‘황진이’의 하지원과 비교되기도 했고, 북한의 원작자 홍석중이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봤는지 “난 송혜교보다 수애가 하길 바랐다”고 했다는 말도 화제가 됐지만 송혜교는 장윤현 감독이 그려내고자 했던 이지적이면서도 도도한, 시대에 맞서는 황진이의 얼굴을 적절하게 표현해 냈다. 물론 적어도 황진이 역할이라면 좀 더 농염한 매력을 뽐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여배우 송혜교가 일선에서 활동할 시간은 앞으로 줄잡아 15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교(二喬)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군웅들의 운명을 갈랐다면 혜교는 ‘슈렉3’와 ‘다이하드4’ ‘트랜스포머’의 내습에 맞서 한국 영화계를 수호해야 하는 중임을 맡았다. 과연 어떨까. 당장은 몰라도 언젠가는 그로 인해 한국 영화계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만하다. 1982년은 한국 여배우에겐 좋은 빈티지(vintage)다. 손예진과 한예슬, 김아중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 이들과 함께 숙성해 갈 송혜교의 모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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