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한나라당의 드라마 공포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나라당에 1997년 선거는 악몽이었다. 이회창-김대중(DJ) 대결은 지려야 질 수가 없던 선거다. 상대인 DJ는 대통령 선거에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 도전하는 '퇴물' 후보였다. 직전의 92년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190여만 표차로 크게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한마디로 '볼 장 다 본' 후보였는데 그에게 이회창 후보는 졌다.

2002년 역시 흉몽이었다. 많은 한나라당 사람들이 "이번만은 틀림없다. 또 지면 정치 그만둔다"면서 이를 악물었다. 중반까지는 쉽게 이길 것 같았다. 상대 후보 노무현은 약체였다. 지지세력도, 정치적 기반도 시원치 않았다. 그를 공천한 민주당에서조차 교체 주장이 거셌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또 끝내기에서 무릎을 꿇었다.

정치의 불확실성을 여실히 보여준 두 번의 선거였다. 이 같은 대역전극에 여당 사람들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며 환호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야당으로 10년을 보내야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흉악한 일'을 두 번 겪으며 고질병이 생겼다. 바로 '드라마 공포증'이다. 막판에 무엇이 튀어나와 일을 망칠지 모른다는 걱정이 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마치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 떨고 있니?"라고 묻고 있는 연속극 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실패 공포증(atychiphobia.Fear of failure)'과 유사한 증후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드라마 공포증은 이제 한나라당의 의사결정에서 최우선적인 판단기준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의 검증 논란이다. 한나라당은 기존의 당 윤리위와는 별도로 후보 검증기구를 만들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상대당 후보의 문제점을 캐고 약점을 공격하는 거야 늘 있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후보들을 뒷조사하겠다는 정당은 한나라당이 처음이다. 이명박.박근혜 양 진영 모두 검증을 승부처로 보고 후보가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 최정예를 저격수로 투입하고 있다.

이 같은 검증 소동이 한나라당에 미칠 영향을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다. 두 갈래 가능성이 모두 있다. 미리 따질 것을 따져서 본선에서 공격당할 부분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거나, 그 폭발성을 줄이면 약(藥)이 된다. 그리고 검증 과정은 흥행 상품이 될 수도 있다. 범여권의 단일화 논의보다 극적인 요소를 갖게 되면 국민의 시선을 끌 것이고, 한나라당이 현재의 우세를 지키는 데 플러스 요인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드라마 공포증을 극복하고 나름대로 '한나라당 편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성공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반대로 독(毒)이 될 수도 있다. 인신공격과 비방, 무책임한 폭로 등으로 서로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다. 교각살우(矯角殺牛)다. 이럴 경우 검증 공방은 치명적인 자해행위로 귀결될 확률이 높다. 상대에 대한 비판이 증오로 바뀌고 통제불능 상황이 될지 모른다. 이러면 경선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수 있다. 설령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상처투성이가 된 후보는 본선을 시작하자마자 상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한나라당은 드라마 공포증에 가위눌린 나머지 쓸데없는 검증 공방을 벌이다가 자멸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적당한 불안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한다. 고양이를 보고도 불안해하지 않는 쥐가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매우 낮은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공포심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다가 삶의 질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우울증으로 발전하면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검증 논란을 보약으로 만들지 독약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한나라당의 몫이다. 특히 두 주자 진영에 달려 있다. 그 선택을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김교준 정치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