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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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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경상도 사람이 정말 친한 사람을 만나면 '문딩이 자슥'이라고 한다. 판소리의 풍자와 해학에 맛을 더하는 것은 질펀한 욕이다. 신영복 교수는 이 욕에서 '인텔리들의 추상적 언어 유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적나라한 리얼리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내뱉는 사람이야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 버리겠지만 문화적 공감대와 깊은 신뢰, 애정이 없으면 심한 불쾌감을 안겨 주는 일종의 폭력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욕설(辱說)'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이다. 성적(性的)인 단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뜻이다. 며칠 전 '스타킹'이란 방송프로에 출연했던 한 여고생을 자살로 내몬 악플도 욕설이다.

1973년 코미디언 조지 칼린의 만담이 미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곱 가지 원색적인 성적(性的) 욕설에 대한 모놀로그였는데 아들과 함께 들은 남자가 분개해 제소했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욕설은 어린이들이 듣지 않는 조건에서만 허용된다'는 새로운 판례를 만들었다.

이런 표현이 단순히 강조용으로 쓰여도 욕설일까. 2003년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한 참석자가 "졸라 훌륭하다(really fucking brilliant)"고 말하는 게 생중계됐다. 오랜 논란 끝에 며칠 전 항소법원은 "기쁨이나 좌절감을 나타내는 이런 단순한 표현은 성적 의미(욕설)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아직 대법원 판단이 남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판결문은 "대통령도 똑같은 표현을 썼는데 방송사만 처벌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외국 정상에게 '열라 길게(damn long)'라는 표현을 했다. 자신을 비판한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같은 놈(Asshole)"이라고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 보통사람이 욕을 하면 자신만 천박해진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말을 쓰면 보편적 언어현상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지도자의 품위는 폼이 아니라 의무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 대통령 후보들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말을 고상하게 다듬는 재주는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비꼰 남상국씨가 한강에 투신한 지 3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한 번 더 시켜주면 잘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말을 믿어야 할까. 어린 학생들의 악성 댓글을 나무랄 면목이 없다.

김진국 논설위원